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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이병룡의 시 두편 - 눈물밥과 운명

 

< 눈물밥 >

                                      - 이병룡

 

청춘이 빠져 나가고 나면

찬밥 덩어리가 되지만

밥솥에서 김이 빠져 나가면

따뜻한 밥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었냐고 묻는

노모의 끝없는 염려가

어디에서부터 왔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찬밥 되고 나서야 알았다

밥은 먹었냐는 소리 들을 때마다

볼에 와 닿는 어머니의 환한 젖무덤

오장육부에 고이는 눈물

 

 

 

우리말에 밥 인사가 유난히 많다. 삼시에 Good을 접두어로 붙여 상대방의 기분을 묻는 가벼운 느낌의 인사를 나누는 서양 사람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정서이다. 진지 드셨는지, 밥은 먹었는지... 그리고 헤어지는 인사말도 언제 밥 한 끼 하자는 거다. 일상에서 가벼이 쓰이지만 진지함만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인사다. 먹는다는 행위가 절실하고 절박했던 집단의 기억에서 온 상처가 일상으로 넘어 온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인사에는 기본적으로 가난이 배어난다.

 

또한 우리에게 '밥'으로 응축된 먹는다는 행위는 생의 의지를 드러내는 단편이 되기도 한다. 생의 의지는 곡기를 끊음으로써 단절된다. 영화<님아,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할아버지는 죽기 얼마 전부터 곡기를 끊는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부여잡고 제발 먹으라고 울부짖던 막내 딸의 울음이 화면 가득 채우지 않았던가.  먹어야 산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먹어야 하는 거다.  그리고 사는 게 바빠 끼니를 놓치는 것은 살기 위해 먹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거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특히 자식들의 끼니를 챙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부뚜막에 남은 식은 밥을 물에 말아 짠지 한 조각으로도 자신의 배를 채웠던 우리의 어머니들... 돌아보면 그 장면은 생명을 전수하는 숭고했던 의식이었다. 그 장면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은 나 역시 그 숭고한 의식의 순간을 몸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숭고함이 창조해 낸 나의 오장육부에 어찌 고이는 눈물 없으랴.

 

그런데 한마디 해주고 싶다. 청춘은 빠져 나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밀어내는 거다. 노화를 청춘의 반대에 두지 말자. 청춘은 청춘의 기치를 모른다. 가능성과 도전의 특권을 그들은 어찌 다룰 줄 모른다. 하지만 청춘의 가치를 아는 나이가 왔을 때 청춘의 사용법을 비로소 알게 된다. 사용법을 아는 자가 주인이다. 그 때부터 청춘은 다시 시작되는 거다. 그러니 노년이여, 중년이여, 자신의 몸에 가슴에 아직도 남아 숨 쉬는 청춘을 밀어내지 마시라!

 

이병룡의 시는 특별히 갈무리해둔 듯한 시어가 보이지 않지만 이미지의 반전을 통해 주제를 잘 부각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가독성이 좋다. 평자들은 이런 시를 좋은시이지만 잘지은 시는 아니라고 한다,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을 바에야 잘지은 시는 그를 추구하는 시인들의 몫이면 충분하다. 대중은 잘지은 시를 찾지 않는다.느끼는 시(엄밀히 말하면 시편이라 해야 맞겠다)를 찾는다. 이병룡의 다른 시를 한 편 더 소개한다.

 

 

 < 운명 >

                            -이병룡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소의 눈보다

커다란 호수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울음보다

큰 천둥소리 들은 적 없고

그가 타고 가는 자동차 보다

더 아름다운 꽃수레를 본 적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신세를 지며

느릿하게 어디론가 바쁘게 실려 가고 있다

 

 

가끔 도로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를 태운 차를 마주한다. 우연히 신호라도 걸려서 나란히 서면 정말 굵은 눈동자에 설움이 한가득 흘러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미안한 마음도 들고 뭔가 한마디 쯤 건네고 싶은데 ‘소의 운명’이란 단어를 너무나도 쉽게 떠올리면서 스스로 말문을 막아버린다. 내가 중이 되지 않을 바에야 답이 없는 이야기가 이러진다는 것을 관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은 첫 제사에서 자신의 죄를 몰랐기에 억울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이고 나서야 자신의 죄를 비로소 알고 숨게 된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아담의 첫 아들인 그의 운명은 아비의 죄가 대물림된 불순종의 상징으로 각인되게 된다. 생명을 해하는 것은 가장 큰 섭리의 위반이다. 그래서 그 죄의 대물림도 그토록 잔인했던 것이다. 아무리 죄에 무딘 사람이라도 생명을 빼앗는 것에 죄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백정들에게 그 죄를 다 뒤집어씌운다. 동서양이 일반이다. 그리고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들을 천시하는 죄를 짓는다. 가벼운 죄로 무거운 죄를 덮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둘 수 있는 앏은 수다. 

 

시인은 소를 태운 트럭을 꽃수레라고 했다. 아직 죽지 않은 생물이니 꽃상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소의 눈물과 울음을 들어주며 그의 마지막 길을 미안한 마음을 뿌린다. '어디론가 바쁘게' 뻔히 알면서 모른척하는 식으로 미안한 거다. 인간에 의해 그 목숨을 작위 당하는 것이 비단 소뿐이겠냐 마는 당하는 입장에서의 ‘운명’은 생의 단절이고 빼앗는 자의 입장에서의 ‘운명’은 핑계요 변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는 표현의 앞뒤에 놓이는 부정과 긍정의 순서에 따라 가치를 달리하는 얄팍함에 민망해본 적이 있는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것’과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사실 둘은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전자는 현실주의자가 되고 후자는 로맨티스트가 된다. 아! 나는 이런 쓸데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할 운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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