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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 뿔 > -문동만-

[ 뿔 ]

           - 문동만

 

오래 묵었는지 뿔이 가렵다

오래 서 있었는지 다리가 저리다

우두머리도 아닌데

늘 정수리에 힘을 주고 먼 산을 경계하던 버릇

관습처럼 털갈이하며 오줌을 지려

파격도 탈주도 없는 테두리를 만들었다

고요해질까

무리를 떠나면

쫓기지 않는 시간, 되새김질하는 긴 시간을

불콰해지는 여백의 숨이 쉬어질까

홀로 강가로 가면

더 깊고 너른 은유의 파문이 번지는지

순수로 빛나는 윤슬의 지분을 얻어 마실 수 있을지

뒤 좇아 오는 사냥꾼이 없어 경계하는 괴로움이 없는 곳

힘센 뒷발을 가진 짐승들로 태어났으나

먼저 차대지 않는 평화지대 같은 곳

그저 나 홀로 고요하고 당신도 고요하여

따숩게 소란한 곳

언젠가 가책 없이 내 뿔을 뽑을 곳

 

 

 

 

 

이 시를 읽으면서 두 단어가 무참히 떠올랐다. 현실 감각, 흔히 말을 하면서 사용할 때는 그냥 한 단어지만 분명히 스타카토가 있는 발음으로 현실과 감각이 따로 튀어 나왔고 시를 여러 번 되새기는 내내 두 단어는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세상을 살면서 한 번 쯤은 세상을 밝히 보아야 한다. 나는 습관적으로 지난 과거를 밝히 아는 듯 이야기 하지만 혼자 돌아 앉을 때는 그것이 내 기억과 현재의 욕심에 따라 이리 저리 변조되고 각색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변조를 가능케 해준 소위 지식이란 것도 기실은 그런 것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해본다. 그러면서도 나는 현실을 직시하며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역시 '과연 그런가?'라는 두 단어의 질문 앞에 쉽게 무너져 버리는 믿음이다. 나는 현실을 직시할지는 몰라도 현실을 현실로 살고 있지를 못하다. 그래서 미래에서 빌려오는 공상을 현실에서 희망이나 꿈이나 소망이나 이런 것들로 둔갑시켜 미래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현실에 대한 변명으로 종종 스스로 조차 속인다. 그 속이는 가장 잔인한 수단이 바로 계획이라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거의 원인은 비록 부분적일지언정 알고 있다 믿기에 미래의 어떤 상태(목표라고 해두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 정의하는 일이 바로 계획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의 현재는 과거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상상하던 미래를 위해 수립한 계획을 실제 행동에 옮긴 결과가 나의 지금이고 그것은 과거 내가 바라지 않았던 혹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미래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계획이란 것을 가지고 다시 나의 현재를 속인다면 그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어리석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턴가 그 계획이란 것이 없이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로 인해 현재를 불안 속으로 떠미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의 흐름을 염세적이거나 허무적이거나 부정적 사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긍정적 사고를 들이댄다. 그리고 긍정이 부정적인 것 보다 좋다라고 가치를 정해 준다. 이어서 그 가치를 이탈하는 것은 꿈이 없는 것이요 현실감각이 없는 것이요 심지어는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이라고까지 말한다. 계획이 사람을 선악의 전쟁터로 몰아가는 이 놀라운 논리는 너무 쉽게 완성되어 버린다, 하지만 저 긍정의 속삭임 속에서 지치고 쓰러져 가는 인간은 없는 걸까? 그렇다면 그 긍정은 선인가? 

 

나에게 있어 현실감각이란 세속적 처세의 감각이 아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 알고자 하는 그런 구도의 감각이다. 그 감각이 밀림에서는 뿔이 되고 도시에서는 더듬이(안테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의미에 다다르기에 충분하기 못하기에 그저 두루뭉술한 감각인 가려움이 되고 만다. 그 가려움을 긁기 위해 한 줄 문장에 목을 메고, 한마디 말에 몹쓸 감정을 연료로 쓰면서까지 악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지 못하기에 '늘 정수리에 힘을 주고 먼 산을 경계하던 버릇'을 가진 문동만 시인이, 뿔을 달고도 도망가던 뒷발로 차대기만 할 수 밖에 없는 그가 사는 동네의 짐승들이 가슴에 박혀 아리다. 뿔 달린 짐승이 뿔을 뽑을 이데아는 석가의 제자가 예수의 천국에 들어가는 기적만큼이나 멀리 있을 것 같기에... 삶의 피로가 이데아를 향한 그들의 목덜미에서 고름 섞인 피를 흘리게 하는 것 같다. 먹이사슬은 육신의 죽음이 육신의 삶을 구축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의미사슬은 육신의 삶과 죽음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자체를 구축하는 영역이다. 나는 그들이 뿔을 달고 당당히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먹이사슬에서는 정점이 아닐지라도 의미사슬에서는 태곳적부터 언제나 당당한 정점이었음을 그들의 뿔이 상징하기 때문이다.

 

PS) 386이 586이 되었다. 컴퓨터라면 기술적 진보를 이룬 것이다. 새로워진 것이고 빨라진 것이다. 가치가 더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릴 때는 그게 아니다. 늙고 낡고 느려지고 무뎌진 것이다. 그리고 가치가 덜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뿔을 뽑아버리기에는 그들의 부모가 살아 있고 그들의 자식들이 그 뿔이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 다시 투사가 될 수 밖에 없다, 비록 우두머리가 아닐지라도 내 뿔이 깨어지는 만큼 그 뒤를 따르는 뿔들이 빛날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다시 투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