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가장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거 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날
나는 사카린도 안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 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 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시를 읽으면서 킥킥대기는 처음이다.
서방님 보내고 남은 아낙의 푸념같은데, 정말 슬픈 장면인데...
아니 슬픔을 숨긴 우스갯소리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든 슬픔과 정반대의 표정인 웃음을 동시에 들이대는 시인의 기발함(?)에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시라고 고집하여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푸념이 적힌 낙서인데...
이 시를 대하는 사람들은 킥킥대는 웃음을 멈추면 아마 모두 심각한 얼굴들이 될 것이리라.
어떤 만남이든 우리는 그 상대에게 어떤 푸념거리를 남기게 될요?
혹은 어떤 푸념을 하게 될까?
만나는 사람들을 또는 그 만남을 모두 심각한 의미로 둘 수 없는 커진 사회 열린사회라지만
커지고 열린만큼 작아지고 닫히는 무성의한 스침을 남발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평생 만족하지(?) 못하고 살았을텐데 '날랜 사람'이란 덕담으로 보내는 아낙의 푸념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날래게 간 서방이님에 대한 감정이 참 묘하다.
일견 섭섭해 보이면서도 애잔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원망도 있고 명복을 비는 마음도 있다.
아마도 어떤 만남이든 이런 복합적인 감정의 낱알갱이들이 뭔지 모르게 다가오는 것이
헤어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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