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도종환
아무리 몸부림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자정을 넘긴 길바닥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너는 울었지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거라는 그따위 상투적인 희망은 가짜라고
절망의 바닥 밑엔 더 깊은 바닥으로 가는 통로밖에 없다고 너는 고개를
가로 저었지
무거워 더이상 무거워 지탱할 수 없는
한 시대의 깃발과 그 깃발 아래 던졌던 청춘 때문에 너는 독하디 독한
말들로 내 등을 찌르고 있었지 내놓으라고 길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나아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지금 나는 쫓기고 있다고 악을 썼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나의 간절한 언표들을 갈기갈기 찢어 거리에 팽개쳤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던지는 모든 발자국이 사실은 길찾기 그것인데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반어들도 실은 네가 아직 희망을 다 꺾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것마저도 너와 우리 모두의 길찾기인데..
돌아오는 길 네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던 안타까운 나의 나머지 희망을
주섬주섬 챙겨 돌아오며 나도 내 그림자가 끌고 오는 풀죽은 깃발 때문에
마음 아팠다
네 말대로
한 시대가 그렇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도대체 이 혼돈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너는 내 턱밑까지 다가와
나를 다그쳤지만 그래 정말 몇 면의 詩 따위로 혁명도, 사냥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한올의 실이 피륙이 되고 한톨의 메마른
씨앗이 들판을 덮던 날의 확실성마저 다 던져버릴 수 없어 나도 울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말대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라고 말하기로 한다
그러나 난파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렇게 잠겨갈 수만은 없다.
나는 가겠다 단 한 발짝이라도.. 반 발짝이라도..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한권의 장편 소설을 읽는 것 보다 버거울 때가 있다. 도종환의 이 시처럼 시적인 운률도 없고 비유나 은유는 들어설 여지도 없는 이런 직설적인 표현들이 삶의 무게를 담고 있을 때 그런 느낌이 든다. 살다보면 누구나 힘들고 지치는 때가 있다. 특히나 그런 때에 놓인 독자라면 이 시는 시인의 작품이 아니라 독자의 자기 독백이 될 것이다. 몸부림,길에서 마시는 소주, 악다구니,풀죽은 깃발... 이 시에 동원된 이 단어들이 입안의 모래처럼 서걱거린다. 그래서 삶이 원망스러워도 한 발 더 걷겠다는데 어깨를 다독여 주자니 죄를 더할 것만 같고 네 잘못이 아니라며 같이 울어주자니 애써 시작한 걸음을 막을 것만 같다. 이럴 때는 같은 넋두리를 할 수 밖에 없다.
<길을 물었더니>
소풍가듯 즐거운 마음으로 떠난 길인데
동무들과 함께 놀며 그림도 그리고
연필에 공책 몇 권이 전부인 보물찾기를 상상하며
그리 떠난 길인데
지금 어찌 앞길이 보이지 않느냐고
예배당 십자가도 모자라
산속 바위틈이며 인적드문 동굴에 숨어
촛불 하나에 고래 래 하늘을 향해 외치고
하루도 모자라 40일을 그저 엎드려
앞을 보여 달라 길을 열어 달라했더니
얻지 못한 것을 마음에서 비웠다 하고
버리지 못한 것을 그저 흔적이라 하지 말란다.
길은 언제나 섰던 곳에서 시작하고
길은 언제나 걷는 자의 고민이라고
한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끝이 있고
더 큰길 더 먼길의 끝도 다르지 않다는 걸
소풍길에는 몰랐어도 지금 선 그 길이 알려 주었단다
친구여, 가방 하나 둘러 메란다
소풍길 다시 한 번 떠나 보란다
그러면 보이는 그 길이 앞길이란다
한 발짝, 반 발짝 걸어 가란다
길,
단 한 글자지만 이처럼 절실하게 생의 의지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길은 쉽고도 어렵다. 길은 반갑고도 두렵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갈랫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가도 길이고 둘이 아니 여럿이 함께 가도 길이다. 그러나 더불어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집이라면 그건 단지 인간이 만든 조형물에 지나지 않듯 목적이 없는 길은 그저 풀없는 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최초의 길은 그저 흔적이었다. 누군가 그냥 걷다 보니 생긴 흔적을 다른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따라가야 길이 된다. 누군가 길을 잃었다면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이 많아서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직 걷고 있지 않아서이다. 주어진 길이란 없다. 다 선택한 길이다. 길이 없다면 길을 찾기보다 만드는 것이 쉬운 길이다.이것이 내가 너에게 던지는 반어들이다.
'서평·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 -천상병- (0) | 2014.11.08 |
---|---|
< 산 > - 유치환 - (0) | 2014.11.03 |
[도라지꽃 신발]- 안상학 (0) | 2014.10.22 |
[밤]-김수영- (0) | 2014.10.21 |
시집 <병든 서울> 오장환 (0) | 2014.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