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꽃 신발]
안상학
공중전화 부스에서 딸에게 전화를 걸다
문득 갈라진 시멘트 담벼락 틈바구니서 자란
도라지 곷을 보았네 남보랏빛이었네
무언가 울컥, 전화를 끊었네
딸아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 않은 저 남보랏빛 꽃처럼
땅 한 평, 집 한 칸 없이 저리 살다 가셨지
지금 나도 저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 않은 얼굴로
아주 좁지만 꽉 찬 신발에 발을 묻고 걸어가고 있겠지
도라지의 저 거대한 시멘트 신발 같은 걸 이끌고
네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환한 딸아 지금 내가 네 발밑을 걱정하듯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내 발밑을 걱정하셨겠지
필시,지금 막 도라지꽃 한망울 터지려 하고 있다
환하지만 다 환하지만은 않은 보랏빛 딸아
내가 사준 신발을 신은 딸아.
- 시집 [아배 생각] 중에서 -
자신의 넋두리를 절대 멀리하라는 시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시집을 소설 읽듯 하면 실례라고 누가 말을 하던데, 이 시집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한 주인공이 한 편 한 편의 시에 등장하고 있어 처음을 잡고 끝을 놓을 때까지 소설 읽듯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시라면 직업이 시인이라 할 만하다 싶어 부러움도 생기고, 싯구 한줄에 제목 달린 시의 의미가 흡사 돋보기에 햇살 모이듯 하는 기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련되거나 시어가 남다르거나 하지도 않은데 그의 자분자분한 말솜씨에 자연스럽게 공감이 간다. 올 해 용기를 내어 시집 한권이라도 내어 볼까 하는 작은 욕심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조바심을 내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이 시집을 읽고 나니 주저되기가 매운 음식 앞에 둔 우리집 강아지 꼴이다.
시를 쓰려면 영혼이 깊어야 한다. 아니면 품부한 감정이라도 있어야한다. 그도 아니면 아름다운 말을 할 줄 아는 입술이라도 있어야 한다. 눈과 귀에 걸려드는 무의미한 의미들을 흡사 젓가락으로 날고 있는 파리를 잡듯 찾아 내는 시인의 재주는 재주가 아니라 재능인 것 같다. 물기 머금은 호수가 같은 촉촉한 어느 가을날의 밤 마음마저 촉촉해지고 착찹해진다. 그 와중에도 금연 결심으로 전시해 둔 빈 담배갑 때문에 담배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나는 고작 담배 생각이란 말인가....
아배 생각이 간절해 시집의 이름을 <아배 생각>이라 지었겠지. 그런데 이런 아배 생각의 뿌리에 자라고 있는 '내가 사준 신발을 신은 딸'을 부르는 목소리에 가슴이 꽈악 조여 온다. 아비는 항상 아이의 발밑을 걱정하여 더 좋고 더 이쁘고 더 자랑스러운 메이커의 신발을 사주려 한다. 하지만 아이는 항상 제 멋에 겨운 신발들을 아빠가 사주지 않아도 부지런히 사서 신고 또 쉽게 버린다. 요즘 아이들처럼 늘 밝은 표정이고 또 또래와 어울려 거리의 유행도 쉽게 잘 소화하면서 재잘거리기에 딸의 가슴이 환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제법 어른 티를 내며 살아가는 고민을 길고양이 먹이 주듯 아비에게 툭툭 던지는 그 마음의 색깔이 그리 환하지 않다. 무지개빛이어야 할 아이의 색깔이 아비가 뿌려둔 무거운 시멘트 때문에 보라색마저 벗어나 아비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이 되어 있다.하지만 너는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작은 꽃이다.꽃에게는 색깔이 전부가 아니다. 꽃은 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색깔을 입혀도 아름다운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 발밑을 걱정했을 때 나는 몰랐다. 나는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네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때로 울컥해 버리는 아비를 네가 몰랐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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