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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소설은 재미와 의미와 여운으로 읽는다. 소설의 재미는 주제와 사건, 등장인물들의 소설적 반응, 문체와 구성, 결말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명대사 등등이 개인에 따라 각기 다른 조합으로 화학적 반응을 하여 다가온다고 본다.  특히 결말에 대한 기대감은 매우 시각적인 자극이라서 독자로 하여금 '백문이불여일견'을 반드시 수행하도록 자극한다.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는 재미있다고 봐야겠지만 어떤 감정을 담은 여운이 남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번역 문학의 한계를 들 수 있겠다. 제목을 보고 소설의 두번째 장을 넘기면서 묘한 예감이 들더니 결국 그 예감은 틀리지 않고 말았다. 크게 나빠 보이는 번역도 아닌데 영국식 영어의 고상한 맛을 살리려는 듯 사용한 고전적인 문체와 단어가 여기저기 암초처럼 널려 있어서 방해가 된다.  영어로 된 소설을 직접 읽어 볼까 싶지만  영국적인 뉘앙스에 대한 해독 능력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객기나 만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잘은 모르지만 번역작가에 대한 처우가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나아진다면 원작자의 의도를 해당국가의 국민 정서에 잘 부합되게 풀어낸 번역 명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작품 자체에 대한 생소함도 있다. 회고록 풍이면서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을 제공하고 반전적 결말로서 독자를 옭아 매는 그런 소설이면 참 좋았을텐데 뭔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쫀득함이 없다. 서스팬스도 없다. 짧은 지식으로 내가 조금 아는 '영국적인 잡담'이 소설의 뼈대에 붙어서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 것은 끝까지 공개되지 않은 에이드리언의 편지와 소설 속의 세 여주인공의 대사 때문이다.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 와 "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몇달동안 에이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라는 베로니카 어머니인 사라포드 여사의 대사에 깔린 복선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소설 중반부에 등장하느 " 토니, 당신은 이제 혼자야'라는 전처 마거릿의 대사, 그리고 '아직도 전혀 감을 못잡는구나,그렇지? 넌 늘 그랬어,앞으로도 그럴 거고'라는 베로니카의 대사는 결말에 이르르 어떻게 풀어질까 하는 작가적 호기심 때문에 마지막장까지 읽은 것이다. 그런데 결론이 화자인 토니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라 포드 여사의 막장 러브스토리가 남긴 불행이 결말이라니... 나만 이런 황당함을 느낀 것인지 궁금하다. 에이드리안의 자살도 여전히 미궁인 채로 마감되는 소설이라니. 차라리 좀 더 막장이 되려면 에이드리안의 생모를 숨겨두고 있다가 베로니카의 어머니란 존재의 유혹에 넘어간 에이드리안이 벌인 섹스의 결과로 아이가 생겨나고 더군다가 그 아이가 자기 동생이 되고 마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베로니카 역시 토니의 저주같지 않은 저주의 편지를 돌려주는 장면을 연출하기 보다 토니 역시 에이드리안처럼 사라 포드여사와 섹스를 했을 것이라는 오해로 토니에 대한 저주를 키우며 살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베로니카가 그날 아침 엄마와 토니가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라면?  '아직도 전혀 감을 못잡는구나,그렇지? 넌 늘 그랬어,앞으로도 그럴 거고'라는 베로니카의 대사가 더 설득력이 있으려나?

 

이 책이 1,2부로 나뉜 이유는 Fact와 기억과 해석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작가적 의도가 아닐까 싶다. 기억은 사실에 가미된 감정과 느낌의 요리다. 또한 기억은 아주 견고하고 단단할 것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망각의 산(酸)이 부어지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기억은 금방 구멍이나고 또 일부는 화학적 반응을 통해 새로운 기억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기억에 대한 믿음을 동일시 한다. 하지만 기실은 기억을 믿는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생기는 혼동이다. 또한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지 않은 일종의 저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기억에 대한 믿음으로 구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쉽게 무너지고 심지어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은 곧 기억의 산물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기억이 바로 우리 자신의 산물이다. 인간의 기억은 Fact를 저장하고 복구하는 과정이 안니라 오히려 FACT에 대한 반응의 저장과 재생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Fact는 저장의 단계에서 Filtering되고 Encoding되고 Noise가 첨가된다. 재생단계 역시 Filtering되고 Decoding되고 환경적인 Noise가 관여 된다. 그리고 시간이란 터널을 통과하면서 망각이 관여 한다.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유니크하다. 일반적으로 집중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어떤 Fact는 집중력과 상관없이  기억되는 독특함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쓴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 담긴  기억의 파트를 지지하고 있는 뼈대가 아닐까 싶다.

 

그냥 책을 덮자니 표지 안쪽 면에 붙은 추천인들의 멘트가 너무 화려하다. 맨부커 수상작이란 광고도  눈에 밟힌다. 설렁설렁 다시 읽어 보자....다시 봐도 화자인 토니의 대사는 별게 없다. 작가를 대변하는 철학적 사유의 흐름도 뭐 그리 대단한 것 같지 않다. 어찌 손을 좀 보면 노인성 치매에 걸린 토니의  기억에 대한 재구성을 통해 불완전한 삶의 마지막 즈음에 불완전한 상태에서의 불완전한 삶의 회고를 제시하는 쪽으로도 이야기를 전개할만 하다 싶다. 주제는 분명하다. 기억이 관여하는 인간 관계와 그 관계 사이를 오가는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에 대한 해석과 오해 혹은 그 해석과 오해에 대한 기억의 이야기다. 예를 들자면 " 토니, 당신은 이제 혼자야'라는 전처 마거릿의 대사는 "너 아직도 베로니카 신경쓰냐? 그럼 난 우리 재결합의 가능성에 대해 이만 접을래!" 라는 의미의 표현인지, " 당신은 이제 혼자니까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어!"라는 격려의 표현인지, "넌 혼자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에 좀더 의지해도 돼! " 라는 조언의 표현인지, " "넌 혼자니까 니가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처리해! 니문제 너이상 내게 가져오지마!"라는 거절의 표현인지 참 애매하지 않은가? 소설의 흐름이나 그 흐름 속에 생략된 흐름은 어떤 것을 대입해도 말이 되는 상황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가 매일 겪는 실제 상황인지 모른다. 대화인듯 대화아닌 대화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 그런 관계가 흔하지 않을까? 갈증을 유발하는 대화들이 참 많다. 좋게 표현하면 은유고 장난스레 표현하면 밀당이다. 이런 갈증을 우리는 대화로 푼다. 그런데 대화로 풀어지는 것들만 기억하면 갈증은 없어진다. 하지만 대화 전체를 기억하면 갈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선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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