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한 하나님의 유혹.
지금 곰곰 돌이켜 보면 교회로부터의 유혹은 아마 사탄의 유혹 만큼 끈질겼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빵과 우유에 현혹되어 성탄절 날 교회 주변을 서성였던 기억에서 출발되는 그
유혹은 지금까지의 세월을 흘리면서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로 인해 지속되어 왔다.
그 첫번 째가 중학교 시절의 친구이다. 중학교 시절 상당히 친했던 은석이라는 친구는
교회를 참 열심히 다녔다. 이 친구 덕분에 성탄절을 지금도 형제처럼 지내는 친구들과 그 녀석이 다니던 교회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은 토,일요일을 꼬박 교회에서 보내면서도 내 기억으로는 일등을 놓친 적이 몇 번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그러나 난 한 번 도 그 친구에게서 일등을 뺏아 본적이 없으니…. 무신론자의 설움인가? 그 녀석에게 난 경쟁자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친구이자 한 번쯤 꺽고 싶은 그런 경쟁자였다. 후에 녀석은 남들이 당연히 생각했을 정도로
서울대 법대를 입학했었고 그런 녀석에게 당시 내가 가진 기준의 출세가 보장된 듯 보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 참 후에 ,우연히 만난 그 친구는 기독교 사회 운동의 이론가로 변모해있었고 그의 아이의 이름도 휼빈이라 이름지어 가난한 사람을 규휼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행색은 무릎이 헤진 것인지 덧대어 꿰맨 바지를 입고 있었고, 눈만은 살아 있었으나 친구의 출세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실망과 함께 솔직히 부끄럽지만 잠시 내가 앞서있지 않나 하는 안도감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서 그 친구의 인생 여정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가 내게 했던 기독교적 유혹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은석이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 1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당시 나는잘 기억 나지 않지만 내가 가진 고민을 그 녀석에게 털어놓고 녀석의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같다. 그런데 녀석은 의자를 하나 그리고 십자가가 의자 밖에 있는 것과 의자 안에 있는 것을 비교해서 설명하더니 내 손을 잡고 주님이 내 마음에 진정으로 자리 잡게 도와 줄 테니 나와 함께 기도하겠느냐고 했다. 나는 녀석의 그런 종교적 진지함에 좀 당황하기도 했고 거절할 경우 친구의 전도의 실패로 인한 실망감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짐짓 눈을 감고 같이 기도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뒤로 교회를 나간 것은 아니지만 은석이와의 그런 경험은 내가 종교적 갈등을 겪을 때마다 내 기억 저편에서 살아 나오곤 했다.
그 다음의 유혹은 대학 시절이었다. 기숙사 생할을 하면서 같은 과 선배인 이경택형이
자신도 믿지는 않으면서 기독교 학생회 모임에 나가고 있었는데 나를 반강제로 끌고 가는
통에 그 모임을 한두 번 나간 적이 있지만 그리 큰 유혹은 아니었다. 다만 유혹이 끊이지 않았을 뿐. 본격적인 유혹은 이승재라는 고교 친구로부터 있었다.
고교 시절 한 반을 했었던 친구로 당시 녀석은 글재주가 남달랐다. 우리 때는 각 고등학교 마다 시화전이라는 행사를 했었다. 그 때가 유일하게 남학생은 여학교에, 여학생은 남학교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였었고 , 전시한 시화에 꽃이 몇 개 걸리냐가 자랑거리가 되고는 했었다. 내가 2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승재가 써준 ‘미르’라는 제목의 시에 내 이름을 올려
전시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도 난 녀석이 써준 시가 꽤 관념적이었기 때문에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풀어준 내용을 외워서 당시 학교로 찾아온 걸스카웃 친구들에게 제법뻐기며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이유로 승재와는 그 뒤로도 친하게 지냈는데 재수한다고 서울 있으면서 몇 번 만나고는 대학 시절 동안 통 보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녀석을 다시
본 것은 85년 쯤으로 기억된다. 어느날 동문회를 나가니 녀석이 신입생으로 앉아있었고,
난 좀 의외였지만 반가운 마음에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숙집을 찾아온 녀석이 나에게 기독교 운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왔고 ks에게 교회 갈 것을 종용했었다. 난 귀찮아서 다음 주에 같이 가자는 녀석의 말에
‘그러마’하고 답하고 녀석을 간신히 돌려 보냈는데 정말 그 다음주 일요일 날 아침부터 하숙방을 찾아와서 교회 가자고 조르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나는 그 전날 하숙집 식구들과 고스톱 친다고 함을 새워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때인데 그런 녀석이 귀찮아서 ‘ 야 다음 주에는 꼭 가마’ 하고 약속하고 돌려 보냈다. 그런데 약속한 다음 주에 녀석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 난 그런 녀석이 좀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뭔가 나를 구속하는
듯한 것이 싫어서 좀 심한 말을 하고 녀석을 돌려 보냈는데 그 뒤로 녀석은 학교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 보아도 그저 그런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나는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승재의 이런 유혹은 은석의 유혹과는 달리 내게 항상 미안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후의 유혹은 집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내가 아내의
종교 생활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나에게 교회 갈 것을 종용하지 말 것을 다짐 받았고,
분가해서는 교회 사람들이 심방이라 해서 집에 오는 것이 싫었지만 집사람이 적당히 내가 없는 시간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커 가면서 집사람의 유혹은 점점 대담해져 갔고,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집에 신경을 그리 쓰지 못함에도 나름의 안정을 찾고 있는 것이 교회 다니기 때문이다 싶어 집사람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초청해서 점심 대접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 일련에 몇번 하는 형태로 교회 나가는 횟수를 정하기도 하고 , 또 가족 성가 대회를 나가기도 하고 ,또 집사람이 아는 교회의 지인들을 몇몇 인사하면서 그 사람들과도 친분을 조금씩 가지게 된다. 그러는 중에 학습도 받았지만 세례 교육을 받으라는 말에 이런 저런 핑계로 거절하고 그저 ‘집사 남편’으로 사업 상 가끔 만나는 교인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 자신을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정도로 나의 교회에 대한 생활은 무난히 지나온 것 같다.
그러나 최근 교회의 유혹은 집사람에게서 온 것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오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 때는 아쉬움이 없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회사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된 상황에서
회사는 자꾸 어려워지고 , 답은 보이지 않고 잠 못자는 밤이 많아질수록 불안감은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계획하고 할 일을 정의하는 것에서 새로운 용기를 얻고자 했으나 그런 계획들이 그대로 실행되지를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날 내 자신이 교만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터에 우연히 찾아 온 마산의 하이콤이란 회사의 송성기 사장의 방문이 교회를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끔 한 것이다. 송사장이 대담 중에 “한 때 어려워서 고민 많이 했었는데 교회 나간 뒤부터마음이 편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 말에 송사장의 얼굴을 다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때 불현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또 다시 나를 유혹하시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이후로 아내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일주일 목표로 새벽기도를 같이 가기로 했으나 하루 나가고 말았지만 주말에 교회 나가는 것을 당연히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송사장의 방문 이 후 권사님의 유혹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권사님이 우리 가정에 대해 같는 관심이 남다름을 알고 있는 터라 , 목사님과 회사로 심방 오시겠다고 하셨을 때에도 직원들 보기가 좀 쑥스러웠지만 거절하지 못하였고 , 가끔 전화하셔서 ‘사랑합니다’라고 시작되는 전화 통화가 고마웠던 터라 집사람 생일에 구지 같이 저녁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교회의 유혹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글솜씨를 뽐내고자 함은 아니다. 은근히 집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교회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내 생각과 신념을 기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집사람에게 이야기 했듯이 氣도 배워야 터득하듯이 종교도 배움과 믿음의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시절 氣治療를 배운 것도 당시 사범이라는 사람이 내게 시술한다고 했을 때의 신기한 체험에서 氣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그 뒤 얼마간 배우지 않았던가. 내게 직접 이런 체험을 하나님이 아직 보여 주시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게 닥친 시련이 나를 교회의 유혹에 넘어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믿어서 해가 될 것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과 내가 기독교를 알지 못하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비판한다는 것도 우습다는생각을 하게 된다.
교회를 나가면서 집사람이 사준 것이 성경 한 권, 그리고 두 권의 책이다. 한 권은 이만재란 분의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글 모음’으로 ‘막쪄낸 찐방’이란 제목이다.
그가 책 중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그는 이 글을 통해 비신도의 입장을 우선 전재하고 자신의 변화를 담담히 적어감으로써, 그리고 믿지 않는 자의 습관등과 기독교가 광신으로 비칠 수 있는 모습들에 대한 적당한 비판을 섞어 가면서 묘하게 Two-way communication에 성공하고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믿는 사람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자세와 현재 내가 판해 왔던 기독교적 모순에 대해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권의 책은 아마도나의 몇 푼 되지 않는 이성적 논리와 많이 싸우면서 읽어야 할 책 같다.
‘막 쪄낸 찐빵’을 읽으면서 몇 가지 공감했던 것을 기록한다.
31페이지 “ 우리가 누군가에게 저주를 보낸다면 그 저주는 그에게 갔다가 다시 제 주인에게로 돌아온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해 준다면 그 축복 또한 그에게 갔다가 다시 제 주인한테 돌아온다. 하나님의 섭리는 의외로 단순한 것이다.”
그런 상식으로 세상을 살면 무리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내 삶은 상식 속에 있었던가?
인간의 삶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없기에 세상사를 전부 상식으로 치부한다면 나뿐 아니라 가끔 비상식적이라 이야기되는 모든 이들의 삶도 상식이리라. 그러나 아니다. 상식이라 함은 ‘의외로 단순한 섭리’처럼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보낼 수 있는 어쩌면 절제된 것이다.
상식은 결코 일상사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어쩌면 상식을 벗어난 ‘의외로 단순한 섭리’를 머리로 알고 말로만 되뇌이는 그런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내가 상식을 벗어났던 것은 욕심이 지나침이요, 그리고 나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며 내 운명이 비극적 종말일 수 는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것에 대한 확신이 항상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교만하지 마라.”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얻은 첫 깨달음이다. 결코 상식으로 모르던 바도 아닌 것이
지금 내게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리고 ‘뿌린대로 거둘 것’을 믿기에 나는 내가 변화해야 됨을 안다.
44페이지. “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착하고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건강한 삶’일 것이다.
‘고통스런 지옥 연습극의 소란’
-> 아마 이런 장면이 내게 비춰진다면 나 역시 주저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만의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인가? 하고
51페이지. ‘ 우리의 육신은 성전입니다’
인체의 신비가 우주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왜 이런 인체의 신비를 시험하고 있는가? 성전을 위한 내 의지의 시험을
다시 한 번 하리라.
94페이지 ‘ 신앙인 지향적 생활을 통해 깨닫고 경험한 일들은 모두가 부족한 나의
‘자기 완성’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게 스스로 경계해야 할
미세한 가능성도 도출되었다.
1. 자기 확신으로 포장된 독선
2. 신앙을 빙자한 위선적 행동
3. 성격을 샤머니즘으로 수용하는 광신
4. 스스로 돕지 아니하고 주님의 뜻이라는 무반성적 타성으로서의 안일과 나태
5. 무비판적 아전인수
6. 신앙숙련공으로의 전락
7. 개구즉착 ‘말꾼이기를 조심하라.
일곱 가지를 적었지만 내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말로하는 신앙과 안일 나태이지 않을까?
독선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것 같고 다만 샤머니즘을 경계하고 있고, 내게 믿음이 아직 없으면서 교인이라 스스로 칭하는 위선을 행하지는 않으리라.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서 왜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반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믿음으로서만 해결 가능한 문제이리라.
정말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면 왜 다른 종교를 용납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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