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지 않는
믿음?]
종종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무조건 믿으라 한다. 그냥 믿어보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그냥 믿어지는가?
성경에서 조차 믿음 조차도 하나님 은혜라 하시지 않았던가?
그냥 믿어지는 것은 없다.
“인간이 따지면 얼마나 따질 수 있겠느냐? ”라고 한다면 세상에 충만하고 세상을 지배하라
시던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따졌기에 지금의 세상의 발전이 있었고, 따졌기에 문제를 알고 성경의 금은 보화를
캘 수가 있었던 것이고 따졌기에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반기독교적인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따지지 말라는 말도 성경 어디에도 없다.
다만 순전한 믿음의 전형, 보지 않고 믿는 것과 이적과 기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믿는 믿음,
도마를 통해 물적 증거를 가진 믿음이 가지는 성도로서의 딱꼬집어 말하기 힘든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눈이 밝아짐으로 그들이 부끄러운 것을 알게 되었지
따지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아담이 따질 수 없었다면 아마도 세상 만물이 같은 이름
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따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의 전후를 따지고, 일의 진위를 따지고, 일의 속내를 따지는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부정
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사명으로 하고 있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믿지 않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와 그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대답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
믿음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지만 처음은 이해를 통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이요 또 믿는 자의
증거, 행동적 증거 그들의 열심히 전하는 말과 신념을 통해 설득되며 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이해를 통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불신앙의 죄를 짓고 있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 또한 죄악이다.
먼저 믿은 자로서 그들이 하루 속히 그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대해 더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간구하며 성경 말씀을 금을 캐듯 보석을
발견하듯 우리 믿음의 주인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성도가 따지는 이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탑의 사건을 통해 인간 스스로 그 이름을 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면서 ,
오직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다.
적어도 목회자는 따지는 것이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왜 따지지 않아야 하는가를
정말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인간이 따질 수 있으면 얼마나 따지겠냐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하심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피조물이란 사실에 대해 정말
따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어느 정도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영적인 삶에 대해 부활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기독교가 체험의 종교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체험하지 않고는 그런 믿음이 믿음으로 자리 잡지 않는 것이다.
강요하는 믿음과 따져 스스로 인정하는 믿음,
우리는 창세기의 사건을 신약으로도 풀어 낼 수 있는 열심을 통해 따짐에는 따짐으로 대응하며 세상에 복음이 가득 차도록 해야 하는 빚진 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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