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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도마류 신앙이 본격적이기 시작할 때 쓴 글

< 라합 과 논개>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요, 이새의 아버지는 보아스요, 보아스의 어머니는 라합이다.

라합, 예수님의 사람의 족보에 올라 있는 여인, 그녀는 기생이었다.

왜 이런 여인이 성경 속에서 자리잡고 있는가? 그것도 아주 중요한 계보로 말이다.

나는 라합을 보면서 논개를 떠올린다.

라합을 통한 이율 배반성에 또 한 번의 도마가 되고 만다.

주여 그치소서!

 

라합은 여리고를 함락하기 위해 염탐을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구원 받은 여인

이다. 라합은 기생이다. 몸 팔고 술 팔아 생계를 이어간 여인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죄악

시 하는 그런 직업을 가진 여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함으로써 구원

받고 그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은 여인이다.

 

왜 이 여인이 등장했을까? 성경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이 가장 무너지기 쉬운 유혹이 육체

적인 욕구와 관련한 것이며 그 죄를 간음이라 칭한다. 그러면 남자들로부터 간음의 죄를 짓

는 통로가 된 이 여인이 왜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았을까? 믿음 때문인가? 그녀의 믿음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으니 아마도 인간이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

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모델로 제시하기 위하여 택하신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예

수님의 인간적인 계보 상에서 가장 천한 것에서 가장 고귀한 세상의 지위를 아우르기 위해

필요하셨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는 귀천이 없으며 누구든지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그 과거가 무엇이든지 묻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리고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민족의 반역자이다. 기생으로서의 라합은 그 직업적

특성 상 상황 대응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의 얼굴만 척

보아도 그들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민족을

팔아먹은 것이다. 좀더 극적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민족에게 알리고 대비하게 해야 했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지내는 무고한 착한 사람들에게

는 피할 방도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라합은

하지 않은 것이다. 성경적으로 따지자면 여리고가 그만큼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악했고 또

그 존재가 불필요했으며 오직 하나의 예외를 통해 그 역사가 연장되어야 필요성이 있었는지

도 모른다. 여리고의 멸망으로 그녀를 비난 할 후대가 없으므로 해서 그녀는 지금 이스라엘

의 자손에 의해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 의해 믿음의 여인으로 평가 받는다.

 

우리의 논개는 어떠한가? 결과적으로 보면 기생으로서 후세의 칭송을 받는 것에는 라합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행위는 정반대다. 논개는 침략군의 장군을 죽이기 위

해 웃음으로 접근하여 적장과 함께 목숨을 버림으로써 민족의 위기에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가장 적극적인 수단의 저항을 실천한 한민족의 잔다르크요 레지스탕스의 모델로 추앙 받고

있다. 그녀는 민족을 팔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했다. 때문에 그녀는 후손이

없다. 그러나 그 민족은 그녀를 위한 사당을 지어가며 그녀의 행동을 칭송하지 않는가?

 

칭송 받는 이 두 여인의 공통점은 그러면 무엇일까? 정의의 실천일까?

한 여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였고 , 한 여인은 민족의 지조라는 정의를 실천하였다.

 

갈수록 도마가 되어간다.

매일 매일 도마가 되어 간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

에 살았던 도마마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그 육신을 직접 만져보고서야  인정하는 어쩌면 인

간의 본성을 표현한 것이리라.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이 존재를 확인했던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간 사람들은 그래도 보고 들은 사실이 있어 믿음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후

의 나는 보지도 못한 것을 창조주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감과 또 하나의 은혜인 육감으로도

확인해 볼 길이 없는 예수님을 믿고자 하기에 그 의심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적어도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 글로써 나의

형편없는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믿음도 은혜라하셨으니

주여! 저를 더 이상의 도마가 되지 않게 응답하소서!

순전한 믿음으로 살게하소서! 그저 제 생각대로 사는 것이 이끌림에 의해 사는 것이라 말하더라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