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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입장을 정하기가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바람에 역사에 깊은(?) 내공을 지니고 높은 식견을 가진 입장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욕구와 사회적 규범의 갈등에 대해 고민하는 사회문제 분석가 적인 입장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의 관점을 가질 것인지.

맨 마지막은 이미 습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버려야 할 것인지 라는 표현이 더 옳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내용은 분명 문화를 틈탄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진지함

으로 포장되어 율법의 죄악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입니다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

지 못한 저자의 무지 때문에 논리적인 화술이 이성적 판단을 무위화함으로써 죄를 죄로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책의 내용 중에 여주인공의 대사 중에 성경에서 이혼을 금했으되 복혼을 금지한

규정은 없다고 했으나, 창세기225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로

시작한 것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이 일부 다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허용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는데 몸종인 하갈을 통해 자손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아내 사라의 생각이지 결코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도 남의 아내(부하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였고 또 다른 아내들을 두었으나

그 죄로 인하여 압솔롬이란 자식의 반역을 겪게 됩니다.

 

아담은 하와를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뿅~간 것이지요.

그래서 뱀의 꼬임에 넘어간 그 여자의 말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벌로 뱀은 몸으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고 살며 여자에게 복수를 당하게 되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갖게 되었으며 남자는 일을 해서 가계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저의 기독교적인 관점은 인아=하와, 재경=사탄,

주인공=아담 이라는 등식으로 소설의 상황을 보게 하였습니다.

인아는 맛있는 섹스로 주인공을 유혹하였고 요리 솜씨와 정리 정돈 잘하기 같은 취미 등으로

남성의 선천적인 약점과 남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제공함으로써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어버립니다.

반면 재경은 인아가 결혼한 몸으로써 결혼을 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성경에서의

사탄은 죄를 알게 하여 사람을 불행하게도 하지만 죄의 소양을 양성하여 죄를 죄로 인식하

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그의 주된 사역이자 임무입니다.

소설 중간 중간에 재경씨는 좋다고 하는데 당신도 이렇게 하자라고 하는 인아의 대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소설에서의 주인공을 아담과 동일시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은 아담의 전형입니다.

 

성경은 일부일처를 말합니다. 한 몸에서 나와 둘이 된 남자와 여자, 그들은 각각 반쪽이지

삼분의 일 쪽이나 사분의 일 쪽이 아닙니다. 둘이 된 하나가 다시 하나로 되는 섭리를

성경은 처음부터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자는 생리 구조와 그 본성의 우유 부단함으로 인해 죄 앞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죄로부터 피해 입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까다로운 이혼의 규정을 성경에 적어둔 것입니다.

 남자는 배설은 있으되 그 결과가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탄의 유혹은

아담에게 전하여 생긴 죄의 결과를 인과 응보적으로 돌려 받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배설의 결과가

항상 여자에게는 남습니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뿌리는 자들보다 그 씨를 열매 맺게 하는 밭을 더 중요 시 하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과 함께 생명 탄생의 기쁨을 통해 창조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기껏해야 창조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다스리는

정도의 일을 했던 것에 비하면 하와에게는 파격적인 은혜가 제공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여자의 후예를 통해 죄를 심판하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보면 저는 골수 예수쟁이입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에 굳이 손 사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제 의식이나 신념의 일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흥미 있는 주제인 3S 중 두 개인 섹스와 스포츠를

선택하고, 고정관념이 가장 강한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와 남성 중심의 성풍속을

엄청난 강도의 일처다부제와 여성 중심의 성풍속과 대결하게 했습니다.

또한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적인 해법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욕구 충족의 자유를

위한 장애 극복의 용기 있는 과감함(?)을 부각함으로써 슬그머니 희석시키고 맙니다

결국 한국 사회가 아닌 해외, 즉 익명성이 강한 사회로의 이동을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일탈로 애써 축소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 대목입니다.

 

 

남녀간의 애정 문제에서 본다고 해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게 남녀간의 문제는 선택과 집중이 보통이지요.

남녀간의 선택이란 문제는 소유와 구속이라는 권리와 의무관계를 형성합니다.

또한 인간은 구속이라는 에 안주하기도 하고, 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저라면 아라는 여자는 한 때 만나는 정도의 여자였을 것입니다.

공짜 섹스 파트너에 이것 저것 잘 챙겨 주는 여자, 아쉬울 때 쓸만한 여자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주인공 남자의 실수는 인아와의 섹스에 중독됨으로써 음식 잘하고 청소 잘하는

, 그리고 같은 취미에 상당한 달변의 말이 통하는 여자, 때론 자기를 이기기도 하는 당돌

함 등이 더 크게 부각되어 결국 결혼이란 틀로 구속하려 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주절 주절이 썼지만, 이 소설이 저에게 있어 단지 흥미거리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는 이유는 이 소설 속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너에게 있는 흔적이 반쪽자리 그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중독된  Sex 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이 소설의 한 대목처럼 저도 어느 순간 여자가 넘쳐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제가 상대에게 한 대사의 대부분은 그 당시를 합리화하는 변명들의 연속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욕구의 해소와 화려한 여성편력의 경력 쌓기, 그것 외의 목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런 목적을 가진 여성들의 숫자가 많아 졌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손뼉을 마주칠 상대가 많아 졌다고 스스로 선수(?)를 자칭하는 일반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젊은 층 일부에서는 이것이 한 이미지라고 하고요.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감동의 러브 스토리에 눈물 흘리는 것이 즐거운 저는 그런 선수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오늘도 간암말기의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스물 일곱 새색시의

사연이 제 가슴을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