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저는 평소 책을 읽을 때 목차에 투자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자들이 어떤 생각을 어떤 구조로 묶어서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과 상상을 먼저하거나
소제목에서 나름대로의 질문을 찾고 ‘글 쓴 이의 답은 무엇일까?’라는 호기심으로 접근하게
되면 한 권을 읽더라도 내 입에서 내 이야기인 양 허세를 부리기 좋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책의 목차를 복사해서 옆에 두고 책을 읽어 나가며 책 속에서의 키워드와 내 생각의
키워드를 함께 적어 놓고 후에 정리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목차에서 큰 상상력을 요구하는 소제목들로 인해 목차에 대한 투자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행복에 대해/ 행복에 이르는 길 /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것 등의 소제목들은 개개인의 인생의 경험과 철학 그리고 사유의 결과로 인해
어느 정도 체화되어있거나 자기가 선택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기에 충분한 주제들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저는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을 책에서 찾지 못한 허탈감도 있었습니다.
저자인 서양 의사가 적은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은 첫째, 자비심을 가질 것, 둘째 자비심을
갖기 위해 공부를 할 것 그리고 셋째로 그 공부의 결과를 삶에 적용시킬 것이란 것으로
요약되고 나면 별로 덧붙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원효 스님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백문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백견 불여일행(百見
不如一行)이라는 짧은 글로도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저의 불편한 느낌의 이유를 아주 잘 표현한 문구를 솔아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솔아가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교재에서 이런 문구를 소개해 주었습
니다. ‘한국인은 유교적 윤리관과 불교적 인생관과 기독교적 행동철학과 무속적 숙명관을
가지고 산다’ 때문에 서양 의사가 밝힌 정도의 달라이라마의 불교적인 깨달음의 경지는
우리에게는 인생관에 투영된 일상의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더 깊은 경지의 행복론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이지요. 번역을 한 류시화 시인에 대한 실망감까지
이어진다면 제가 너무 심한가요?
그러나 저자가 달라이라마와의 대화 내용을 적은 것들 중에서 적잖은 箴言(잠언)들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나 종교에 대한 나름의 질문꺼리를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책의 도전은 목차를 펴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문구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 행복이 삶의 목표라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인가?” “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 속에
있다면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자기 발견의 과정인가?”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과정을 채우는 컨텐츠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생각과는 배치
되었고, ‘우리의 삶이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 내재된 행복의
측면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표현이 달랐기 때문에 다음 페이지
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행복을 의무로 표현한 헤르만 헤세의 글귀가 적힌 것
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이 의무라면 우리 대부분의 인생은 그 의무에 태만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행복이 권리라면 우리가 우리의 의지가 아닌 채 겪게 되는
불행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정될 수 있기에 의무라는 표현도
맘에 안들었지요. 그러나 저는 곧 이 책을 읽는 태도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세계적인 영적인 지도자인 달라이라마의 행복에 대한 심오한 정의와 그가
생각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나니 오히려 인간적으로 솔직한 그의
모습이 좋아졌습니다. 그러고 또 책 속에 박혀 있는 보석 같은 잠언들이 제 메모지 속에
적혀 지더군요. 제 메모지를 옮겨 보겠습니다.
< 사실 행복happy이라는 단어조차도 운이나 기회를 뜻하는 아이슬란드의 햅happ이란 단어
에서 온 것이다>
- happy는 운이나 기회(happ)를 가진 사람(-y)을 가리킨다. 반면에 한자어 幸福은 복을
바라는 행위를 가리킨다. 전자를 결과로 본다면 후자는 오히려 복을 위한 노력을 강조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글에서는 행복이란 동사적 단어에 ‘-하다’라는 행
위 동사를 덧붙여 복을 받은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행복이라면 한글
의 幸福은 오히려 行福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만족감은 우리가 가진, 비교하는 습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 安分知足, 우린 이미 비교의 해독에 대해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 사람 앞에서의 만족보다 스스로에 만족하는 것, 이것도 심하면 나르시즘이란 병이
되니 만족은 그 경계를 긋기가 매우 힘든 개념인 것 같다.
< 불교에서는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결정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부와 세속적인 만족, 영적인 성장,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범주에 있지 않을까?
- 부에는 행운과 능력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세속적 만족에는 욕구의 충족이란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영적인 성장과 깨달음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하나일 수
도 있고 서로가 시간적 우선순위나 인과 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개념으로 보인다.
< 아, 정말로 이것이 내게 필요할까?>
- Wants로부터 옥석을 가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Needs를 정확히 다시 묻는 방법일 지
모르겠다.
< 만족을 얻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걸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원하고, 또 그것에 감사하는 일이다>
- 만족과 포기는 어떻게 구분될까? 만족하기에 포기할 수도 있고, 포기를 통해 만족할 수
도 있는데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집착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 행복을 찾는 첫번째 단계는 배움입니다….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어떤 생각과 감정이
쓸모가 있으며 어떤 것이 해로운가를 이해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변화의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
- ‘무지는 불행한가?’ 라는 반문을 하게 되지만 ‘불행한 사실을 아는 것’과 ‘행복을 위해
배우는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내 든다.
< 삶에서 당신이 바라자 않는 어떤 일 들이 있다고 하면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런 일을 일으키는 상황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과 조건을
찾아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
- 이건 정말 단순 명료한 변화 계획의 기본 원리인 것 같다.
<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고 방식을 바꿔야 하며, 행복을 발견하기
위한 오직 한 가지 열쇠와 비결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우리의 지식이 세밀할수록 더 효과적으로 환경에 대처할 수 있다.>
<인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평화롭다. 그리고 타인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성장한다….
우리는 공격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 그런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지능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을 잃은 인간의 지능,
지능의 잘못된 사용,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
< 행복을 확고한 목표로 정하고, 체계적인 수행으로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 수행의 결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행복의 한 단면이 아닐까? 행복은 이 책의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많은 요인들로부터 다양하게 개인에게 적용된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건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건 얻어진 행복이 그 삶의 균형을 잡는
한 행복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위의 말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을 지
모르겠다.
< 첫 번째 종류의 자비심은 집착과 섞인 것이다. 즉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비심은 모든 인간 존재가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극복하려는 본질적인 소망을 갖고 있다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운동선수는 혹독한 고통이 따르는 훈련을 뛰어난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당신이 근본적으로 고통이 자기 존재의 자연스런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삶의 시련에 부딪힐 때도 의심할 여지없이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불교도들의 시각에 따르면,
고통의 근본 원인은 무지와 욕망과 미움이다. 이것들을 ‘마음의 세가지 독약으로 부른다.
무지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모든 현상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
하고 있다는 뜻이다.>
<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의 소망을 대신 이뤄주는 것입니다.>
< 죄를 고문처럼 느끼는 까닭은 모든 문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변화가 가진 긍정적인 면이다.
반면에 부정적인 면은 우리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고통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
한다. 그것은 바로 변화에 대한 저항이다.>
< 시각을 바꾸는 능력은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능력은 마음의 유연성에서 나온다…마음의
유연성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려는 노력, 그리고 시각을 넓히려는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 나병환자가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살을 썩게 만드는 병원체 때문이
아니라, 팔다리에서 통증의 감각을 잃게 만드는 질병 때문이다. 통증이 주는 보호장치가
없는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세포가 손상 받고 있다는 경고를 받을 수 없다.>
< 육체의 통증이 우리가 하나의 몸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듯이, 고통에 대한 경험
은 다른 사람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힘을 가진다>
< 변화에 이르는 과정은 배움, 결단과 의지를 높이는 일, 노력이다>
< 고통을 주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은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는 정당한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들은 무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 문제로 고민하기 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데 힘을 집중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 나는 올바른 동기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 내가 기본적인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선함, 친절, 자비 그리고 관심 같은 기본적인
인간의 특성입니다.>
Q1. 기독교적의 원죄설은 성악설인가?
- 인간의 창조는 선한 의지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선악과에 손을 댐으로써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전락한 것으로들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born-siner가
아니라 죄에 감염되기 쉬운 약한 존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악설은 아닌듯하다.
Q2. 성경의 죄의 대물림은 윤회와 무관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윤회가 전생과 현생과 이생의 삶이 그 업이라는 인과 관계의 고리로 이루어진다면
죄의 대물림은 바로 그 윤회일 것이다.
Q3. 영생이나 환생이나 인간의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이지는 않는가?
Q4. 영적 해방, 고통과 끝없는 환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깨달음을 통해 윤회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윤회의 섭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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