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3. 사막과 피라미드?
A3.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이나 자연물들은 참 많이 있다.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되고… 산도 강도 바람도 다들 그런 모습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막이 참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막은 그 구성이 아주 단순하다. 그냥 모래들뿐이다.. 그래서 사막의 풍경의 풍경도
단순하다. 그러나 사막의 모습은 무척 다양하다. 사막의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고,같은
자리에 서서 매일 같은 풍경의 사막을 구경할 수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매일 변화하는 그 모습들도 어딘가에서 본듯한 바로 그 모습이며 그
주변의 모습들도 매우 닮은 모습들일 것이다. 사막의 변화는 바람 때문이다.
사막은 ‘바람’으로 인해 다양성을 가지지만 또 ‘바람’ 때문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생도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삶을 단순화하면 정말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삶은 시간의 연속이며 모든 구성이 그런 시간 속에 포함되어 있을 따름
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참 많이 닮아 있다. 다들 먹고 자고 싸고 하며
산다. 그런데 그 모습들도 하나 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삶의 다양성은 ‘바램’으로 인해 생긴다. 자신의 삶이 어떠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램’
때문에 이 세상 60억 인구의 인생이 이처럼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램’들도
인간이 가지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기에 어제를 산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 또
우리는 마주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보물 찾기에 왜 피라미드가 등장했을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죽은 자의 부장품이 많이
묻혀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사막과 연관 지으려니 적당한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피라미드를 인간의 죽음과 연관 지으면 우리 인생의 보물 찾기는 어쩌면 삶의
끝에서나 답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이유를 암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인생의 ‘보물’은 매우 주관적이다. ‘인생의 보물’만큼 가치의 비중에 따른 편향성
을 가진 것은 없을 것이다. 흔히 돈과 명예와 권력이 성공의 척도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전술한 세가지가 행복의 척도인가? 라는 질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혹자는 영향력의 척도이지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고도 한다. 영향력은
위의 세 가지와 무관한 사람들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역사 속의 많은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예는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처럼
박애와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보물을 남김으로써 보물을 찾은 사람들
이라고 생각된다. 까뮈가 이런 말을 했다.
“ 행복이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할 때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추구하고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성공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을 때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성공이라는 보물은 나눔을 통해 얻어지지 않을까?
슈바이처 박사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본다.
“성공이 행복의 열쇠가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다.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칭송 받을 만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 사람이다. ”
Q4. 우림과 툼밈의 의미와 가치는?
A4. ‘예’ 또는 ‘아니오’의 답변을 해주는 크리스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초반부에 언급되었
을 때는 보물 찾기에 있어 무언가 중요한 단서 혹은 열쇠를 제공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소설이 끝나도록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만다.
소설에 적힌 우림과 툼밈의 설명을 보면 ‘표지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쓰며 ‘언제나
분명한 질문이어야’ 하고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우림과 툼밈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결정할 것을 작가는 권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느낌’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작가는 표지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이런 표지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어떤 이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어떤 이는 깊이 장고에 들어 가고, 어떤 이는 잠정
적인 결론을 내리고 일단 부딪혀 보면서 그 느낌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애써 무시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철학관관 점집을 기웃거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이
라면 작정 기도에 돌입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런 노력은 다 느낌을 계시로 분명히 하고
이런 계시의 답을 현실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내 인생의 여정 위로 밀려올 때 지인의 손에 이끌려 마지
못해 철학관을 찾은 적이 있다. 그 때 그 철학관장의 말씀인즉 “아마 70% 쯤은 맞고
30% 쯤은 틀릴 것입니다. 주역은 굉장히 과학적인 학문이고 인생이란 것이 그리 특별
한 것이 없어 대부분은 맞지만 여기서 제가 드리는 선생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선생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렇게 되든지 안되든지 할 것입니다. 이 철학관이란 곳이
사실은 인생의 힘든 결정을 대신 내려주는 곳이 아니라 양방의 정신과처럼 삶이 여의치
않을 때 나름의 위안을 받는 곳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의 분석적인
질문에 대충 눈치를 채신 철학관장님이 내가 받아들이기 좋은 말투로 나를 설득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분의 말씀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동양 철학관이란 곳들이 소설 속의 점쟁이들처럼 현재의 표지를 읽고 미래를
짐작해 주는 곳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운명을 설명해 주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은 사람들이 철학관장이나 점쟁이들을 우림과 툼림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는 인생에 대한 어떤 느낌 보다는 내 인생에 대한 긍정적 결과나 과정에 대한
자기 암시를 더 많이 하는 타입이다. 그래서인지 문제나 어려움이 닥치면 이것이 결과
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겠거니 생각한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걸쳐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앞에 두고 “ 나 인생은 왜 이럴까?”하고 생각해 본적은 별로 없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 있었는지 복기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획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방법들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일관성이란 것에 있다. 교만과 게으름
혹은 몸에 밴 나쁜 습관들이 가장 큰 방해꾼들이다. 그 때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언제나 분명한 질문이 하나 있다.
“
은 언제난 분명하게 “ 아니야!”라고 답해 준다. 자존심은 교만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인생의 가치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한 우림과 툼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서 또 한가지 ‘예/ 아니오’의 답을 얻기 위한 ‘언제나 분명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대화의 기술을 가르칠 때나 고객을 상담하는 영업 교육
시간에는 고객으로부터 ‘예/ 아니오’의 짧은 답변만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폐쇄형 질문(Closed Question)이라 부르며 부정적인
느낌을 주게 만들었고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것, 다시 말해 질문을 받는 사람
이 자신의 입장이나 정보를 더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을 개방형 질문
(Open Question)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예/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분명한 질문들은 엄청 많다.
첫째가, 진실의 여부를 가리기 위한 질문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구분이 가능한 참과
거짓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 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안다.
거짓의 의도를 숨긴 참이 많고, 때로 참의 의도를 숨긴 거짓도 있다. 이것을 식별하기
는 매우 어렵지만 식별의 시작은 분명하다. ‘ 이것은 참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둘째는, 선택을 위한 질문이다. 세상 살다 보면 할까 말까를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선택은 선택의 꼬리를 물고 또 방법이 꼬리를 문다. 인생의 기회에
집중하는 사람은 이것과 저것을 고르는데 시간을 보내고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라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반복되는 선택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주어 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되돌아 가기’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주어져 있다.
셋째는, 존재의 구분하는 질문이다. 세상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
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논리적 추론 능력과 정보의 한계성 또는 무지들로 인해 “ 있을
것 같기도 한 것”을 만들어 냈다. 물리적인 것들은 그래도 분명한 편이다. 존재를 확인
하면 되니까. 그러나 추상적인 것들 예를 들면 인생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 같은 것들
은 주관이 반영이 되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애매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이런 문제의 존재에 대한 반응은 끝까지 확인하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하는 양자 택일적인 입장이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확인하는 것
이 좋다고 생각한다. 긁어 부스럼이라고도 하지만 문제를 확인하는 것과 긁는 것은
구분되어야 할 일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살만큼 인생이 한가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호,불호를 따지는 질문이다.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개성 있어 보이고, 더 많은 신뢰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믿는다. 인생의 아이러니에는 좋은 것을 좋다 하지 못하고 싫은 것을 싫다
하지 못하는 경우,소위 말해 관계의 부조리 혹은 사회적 부조리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경우에 따라 그 부조리를 삼키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이기도 하지만, 삼킨 부조리를
배설할 능력이 없으면 그냥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정신과 병동을 자주 가야만했던 경험이 있다.(물론 내가 아파서는 아니다).그 때 주변의
환자나 여러 의사 간호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얻었던 결론은 약물 /알코올 환자든
정신착란이나 우울증 환자든 모두다 이런 부조리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희생의 가해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좋고 싫음을 먼저 분명히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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