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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독후감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지음

오랜만에 읽어보는 수필집이다.
리더십, 경영, 철학, 코칭,역사서, 미학을 떠돌다가 편안함 마음으로 대했던 책이다.
신영복선생님의 기행문적인 수필은 그곳에 놓여진 역사의 흔적이나 사람들에 대해
상당히 깊은 생각을 요구했기 때문에 말 많은 나도 따라 잡기가 편치는 않았다.

 

그런데 장영희씨의 이 책을 읽고 나니 두가지 우울한 생각을 갖게 된다.

 

하나는 학창시절 시인을 꿈꾸었던 사람이 이렇게도 문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나 하는 생각이다.

책에 소개된 문학 작품 중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흔히 문학이라 일걸어지는 소설류의 책에 대해서는 내가 '재미'나 '느낌'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뿐

곱씹어 삼키는 끈기와 생각하고 비추어보는 소양을 가지고 있지 못한듯하다.

 

다른 하나는 책 내용의 전반에 흐르는 장애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그에 대한 저자의 다소 수동적인 대응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장애우에 대한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반추해본다.

내 세째 외삼촌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계시다.그런데  그분은 내 기억 속에는 항상 외삼촌 형제분들 중

누구보다도 환한 웃음과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본인은 상당히 불편하고, 또 남모를 고뇌와 슬픔이

어찌 없겠냐만, 항상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에 호탕한 웃음소리로 가족 모임에서는 어두운 구석을 보이지 않으신다.

그래서외가 쪽 가족 모임에서는 아무도 세째 외삼촌의 장애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니 차라리 의식하지 않는 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삼촌을 통해서는 장애레 대해 우울하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 아버지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버지는 40이 좀 넘으시면서 병원에서의 약물 처방이 잘못되어

청력을 많이 잃으셨다. 그래서 보청기를 하기 시작하셨는데 이것 때문에 아버지는 줄곧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셨을 때

항상 '귀도 안들리고..'라는 자조적인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근년에 우울증에 걸려 상담을 받으실 때도 청각 장애는 아버지의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으니...

아무튼 나는 아버지를 통해 후천 장애로 인한 한 남자의 우울한 느낌을 보게되었고 ,

한 편으로는 몸이 조금 불편함으로 인해 세상일에 그탓은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조막손이셨다.시집오신지 얼마안되어 사기 그릇을 하나 깨뜨리셨는데
시부모님의 불호령이 두려워 깨진 그릇의 아귀를 맞추어보시고는 어떻게든 붙여 보려고 하시다가 잘못하여

손목의 인대를 다치셨다. 지금같으면 병원에서 수술을 했더라면 그렇게 심하게 불편하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그저 된장바르고 아물기를 기다리셨다니...
그 후에 손목을 둘렀던 헝�을 풀어보니 손이 펴지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손을 무척 부담스러워 하셨다. 양친이 모두 교직에 계셨던 탓이라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할머니의 푸념 속에는 항상 그 손이 등장했다.
20대에 다치신 손이 93세를 향수하고 하늘로 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가슴에는 꼬여진 소나무의 옹이마냥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이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 이 손으로 너를 키우고, 네 동생들도 키우고, 그래도 내 할일 다하고 살았다..."
그 말이 마음에 남아서인지 할머니 돌아가시고 , 입관할 때는 그 손을 펴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마음이 더 아팠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할머니의 그 조막손은 지금 나에게는 할머니의고마움을 추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친구가 하나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과거 시제로 쓰게 되었지만
소위 S대 경영학과를 장학생으로 입학하고도, 법학과를 가겠다는 핑게로 사실은 문학도가 되고자 재수를 했던 친구다.

당시 그 친구의 글은 또래의 글에서는 찾을 수 없는 놀라움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특히 사람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과 표현은 나중에 내 친구 중에 이름난 소설가가 한 명 생기겠구나 하는 기대와 함께,

같은 나이에 철부지같은 반성문조의 일기가 쓰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렌즈를 끼고도 안경을 껴야 앞이 보이는 시력이 아주 나쁜 경우였다.   
특히 밤에는 그저 불빛만 보고 걷는 정도인지라 밤길을 갈 때는 항상 내 어깨를 빌리곤 했었다.

그런 그 녀석을 생각해서 먼저 손이라도 잡아 줄라치면 몸시 자존심 상해하며 화를 내곤 했었는데,

후에 화난 것이 미안했던지 자신이 가진 시각 장애에 대해 이런 푸념으로 사과를 대신했었다.

" 난 내가 눈이 더 나빠져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할까 두려워.."

그 친구에게는 세상을 향한 창이 닫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또 한 분은 진주경상대 통계학과 교수님이셨는데 지인의 소개로 알게되어 가끔 진주에 가면 찾아뵙고는 했었다.

지금 기억으로 그 때 아마 전국 장애인 협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그 분이 인상적인 것은 그분의 말씀 때문이다.

" 정군, 자네는 세상 똑바로 살고 있어? 나는 다리가 병신이지만 자네는 마음이 병신이되어 살지는 말게!"라고

술자리에서 내게 하셨던 말씀인데 그 말은 지금도 내 머리에 생생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렇게 그냥 주변을 둘러 보아도 흔한 것이 장애이다.

물론 본인이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이지만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을 우리가 특별히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의 본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행복을 그토록 원하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

이 문제를 던지고 저자는 책의 중반부에서 " 자전거를 사줄 수 있는 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어린아이의 대사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는 '장애가 있는' 행복에 길들여 있는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보다 행복해야하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 하나는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시간을 가르치기 보다 경쟁하고 먼저 나서기를 가르치고...

 

삶의 한 단면에서 문학의 향수를 길어 올린 장영희 교수, 그녀가 책의 마지막에 힘주어 이야기했던

삶에 대한 희망에 대한 글을 통해

'눈물의 카타르시스'보다 '희망의 카타르시스'가 넘치는 행복의 숲을 거니는 꿈을 그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