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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과 관련한 단상]

 

 

겨울은 항상 구들장을 찾아 다니면서도 언제나 집을 떠나 나돌아 다닌 기분이고
봄은 항상 밖을 돌아다니며 꽃들과 새순들을 찾아 다니지만 집에 돌아온 , 혹은 고향을 찾은 기분입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번에 은퇴했다는 민용태 교수의 대담프로그램을 청취하게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은퇴를 하실 정도의 나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좀 의아했습니다.


대담 중에 이런 민교수님의 답변이 저를 아주 공감하게 하더군요.

 

" 정부에서 영어 교육을 강화한다는데, 잘하는 우리말을 두고 영어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
  그것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필리핀을 보십시요. 영어를 스고 있지만 그 나라가 잘사는지요?"

 

정말 정확한 표현이셨고 정확한 예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날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 역사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식민지의 역사는 자기 전통의 역사를 회복하는데 정말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일제의 잔재를 벗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아직도 우리의 언어 생활에 남아 있는 잔제를 가끔 대하지 않습니까?

 

" 빠꾸 오라이~, 빠꾸 오라이~" 기억나십니까?
등교길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던 시절 종점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 갈라치면 돌려 서는
차 뒷편에 서서 유창한(?) 차장 아가씨의 영어소리가 들리곤 했습니다.

아직도 이 '빠꾸'는 우리 언어 생활에 통용되고 있습니다.

아마 건설 현장이나 자동차 수리점 등에서 이런 일본식 발음의  영어를 쉽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부가 영어 교육 강화에 표방하는 명분은 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혹은 국제화된 사회에서 경쟁력을 지니기 위한

필요한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수단이지 유리 교육 현장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절대 절명의  
수단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부존 자원이라고는 정말 인적 자원이 다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국제적 역량을

기른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제적 역량이 영어 교육의 강화를 통해 오는 것인가는 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핵심 역량이 무엇인지를 가려야할 때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반추하고 세계의 대세를 가늠하고 국민의 열망을 모으는 과정을 통해 가려질 것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영어 교육 강화가 국제적 경쟁력 강화의  전위로 나선 것은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차라리 외국어 교육 강화라고 좀 더 포괄적으로 목표를 잡는 것이 정부 정책으로서는 보다 당위성이 있는 것이며,

예전에 어떤 정권에서 내세웠던 지역 전문가 양성을 통한 국제적인 역량 강화가 더 타당할 것입니다.

 

아무리 해당 외국어를 잘하더라도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그 언어들에 포함된 '뉘앙스'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내 의견을 피력할 뿐이지 진정한 감정의 소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교 무대에서는 미국식 영어가

유창한 사람보다 영국식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오히려 더 대접 받는다고 합니다. 같은 영어라도 사용되는 영역에 따라

그 원산지가 구별됩니다. 이처럼 외국어는 소통의 수단이며 수단은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따름입니다. 영어로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구지 영어로 수업을 하지 않아도 현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것을 잃어갈 때 우리의 정체성도 함께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 단어 모르는 것은 사전 찾아보면서 국어의 용법이나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 것은 드문 것이 요즘 아이들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시대 사조를 바로 잡아야할 시기 입니다. 386 세대의 아버지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가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386은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가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 386의 아이들은 이제 무엇이 과제이겠습니까?

우린 그것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집에 아이가 하나 혹은 둘 밖에 없는 지금은 더불고 나누는 삶의 실천이

아마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요? 우리 아이들은 형제 중 하나가 어찌 사고라도 당해 죽으면 형제라는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형제 하나 잃고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피 붙이라고는 없는 그 아이들이 과연 어떤 환경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아이 하나에 대한 우리의 극성을 대물림하려고 우리의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정말 우리 386 세대의 과제는 우리의 아이들이고 정말 시급한 문제입니다.
      
정말 지금의 정부가 국가의 경쟁력을 목적으로 한다면 차라리 영어에 교육에 사용될 국가의 예산을
스스로 유학갈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재능있는 학생들을 발굴해 유학을 보내 주는 것이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는 더 전문화되고 경쟁력있는 인력을

길러내는 방법일 것입니다.

 

영어를 외치는 정부를 보면서 내 조국의 미래와 지금 맞는 봄을 견주어 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우리의 고향이 주는 향수와 같이 꿈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것,
혹은 언제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내가 분명해야 분명한 남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지향하지 않고 세계를 지향한다면 그들과 유창한 영어를 통해 동화될 수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원어민을 아무리 데리고 와서 영어 교육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영어가 유창해 진다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하는 말만 유창한 영어가 될 뿐이며, 오히려 원어민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어색함을 강조할 우려도 있습니다.  

영어 교육을 강조하기 전에 정말 국가 백년지대계를 위해 무엇을 우리 교육에 강조를 해야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영어 교육 아니 외국어 교육을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수단과 목적이 도치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난다는 책도 있습니다. 교육은 바로 인문입니다. 인문의 핵심은 꿈과 창의력입니다.

정말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깊게 박고 있어야할 것이 교육 철학임에도 우리의 교육 철학은 입시철 마다 시류에

뿌리가 흔들립니다. 제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386세대의 이전의 부모님들은 적어도 학교와 선생님을 

믿고 그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란 우리 386들은 학교와 선생님을 믿기 보다 그들의 판단을 믿고

모두가 학원들 다니고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정보에 민감해야 하는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안전하다거나

자녀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들 하고 있습니다. 사교육 시장 우리 아이들이 필요해서 커진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필요해서

커진 것이며 그 커진 사교육 시장은 지칠 줄 모르게 아이들과 부모와 사회에 경쟁 논리를 부추기며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영어 교육 강화 정책이 발표된 이후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실행되는 지 경험도 하기 전에 벌써 영어 학원이

예전보다 더한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적어도 정부가 영어 교육 강화를 하겠다면 사교육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영어를 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일텐데도 그런 특수가 왜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조금이라도 더 해두면 자기 자녀가

학교에서 좀 더 잘 할것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사교육 비용에 등골이 휘는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한가

자문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정말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줄 때 경쟁의 논리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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