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시작한 글의 일부만 올립니다.
다 올리면 분량이 너무 많고, 인간 관계 난해성 부분만 발췌해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란 주제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 왔고, 고민하고 있고, 고민해 갈 화두로서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도 명확한 공통의 해법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이다.
책을 통해서는 특별한 그 무엇을 찾지도 못했고, 그저 뒤집기와 다시 보기 정도의 소감을 얻었을 뿐이다.
하지만 주제가 너무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래서 내친 김에 내 버전의 ‘사람 사이’에 대해 한 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어떤 결론을 예측하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40여 성상의 사람 사이들을 반추도 해보고
또 앞으로의 나의 자세를 갈무리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사람 사이의 난해성>
왜 사람 사이가 이토록 역사를 거듭하면서도 반복되는 난해성의 문제일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사람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기 때문에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
인생이란 것이 대충 살면 육십이요 기껏 잘 살아봐야 구십이다.
그 동안에 겹쳐지는 세대라고 해봐야 3대 혹은 4대이다.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유한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정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정답이라고 한 것들이 다 모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 전해질 수 있는 것도 유한하다.
사람이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도 변화하지만 환경과의 관계에 의해서도 변하고 그가 만든 환경에 의해서도 변한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 인간관계에 대해 전수 조사를 할 수도 없지만, 표본 조사를 해서 답을 내려고 해도
시간과 공간을 묶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거창하고 차별성 없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을까?
인간관계의 본질에서 이유를 찾아보자.
세가지 정도가 언뜻 떠오른다.
인간관계는 무형의 가치관계이고, 네트워크 구조이며, 본질적으로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아닐까?
- 무형의 가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느낌과 의미와 의식(意識)이라는 무형의 것이 존재할 따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질이 존재할 수는 없다. 물질의 의미가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이 무형의 것에 대해 그 크기와 중요성의 잣대를 가지고 가늠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가치(Value)라고 부를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가치의 관계이다.
홀로 존재하는 각각의 사람에 대해서는 동등한 자격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그나마 어렵지 않은 이야기지만,
더불어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자격과 가치의 잣대가 틀리게 적용되고
또 그 가치(또는 의미)가 서로 교환되기 때문에 어려운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
또한 사람 사이의 교환(상호작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은 그 방향성과 크기 등이 동기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이 완벽하게 서로 일치되고 이해되는 교환이 아니기 때문에 ‘뜻한 바’와 ‘받아들이는 바’가 어긋나는 ‘오해’라는
장난감이 되어 버리곤 한다. 오해가 장난감이 이유는 곧잘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놀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 사이는 가치를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형평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고 교환의 목적이나
교환을 통한 만족 획득의 수준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인식하고
그 간격을 좁히거나 멀리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그런데 이 의도란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잣대가 없기 때문에 학습을 통하거나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그 양과 질을 조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제한적인 의도이며
상대방에 대한 고려 혹은 배려라는 양념을 통해 상대가 받아 들일 수 있는 한도를 넓히는 방법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어려움을 낳는 결과를 종종 발생시키기도 한다.
- 복잡한 구조 자체
한 사람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만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시점을 현재로 고정한다 해도 지구의 인구수만큼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의 수를 더하면?
굳이 머리 아프게 세지 않아도 복잡하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가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한 개인의 예를 들어도
가족관계, 친구관계, 직장 관계, 특정 모임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친구의 가족 관계, 가족의 친구 관계,
가족의 직장 관계, 친구의 직장 관계, 모임의 가족 관계 등등 여전히 복잡하다.
인간 관계란 것은 수직적으로는 나뭇가지가 뻗어가듯이 뻗어 나갈 수 있으며, 수평적으로는 이른바 N2N의 관계이고
이 수직 수평의 관계는 한 개인에 다른 개인이 연결될 때 마다 입체적으로 첨가될 수 있다.
이론적이지만 정말 복잡하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관계의 한계를 만든다.
좀 쉽게 이야기 하면 거미줄을 친 한 거미가 다른 거미와 어울리기 위해 다른 거미집과 연결 했는데
둘일 때는 그나마 구분도 쉽고 몸을 옮기기도 쉬웠는데 한 100마리쯤 모여서 연결하고 나니 서로서로 얽히고 설켜
외견상으로 거미집 뭉치가 누에고치가 된 형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될지 모르니까 남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가든지 나만의 방법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 자기 정체성의 문제.
인간관계는 나와 타인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있어서의 나의 관계이다.
나와 타인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나와 세계와의 관계 혹은 나와 우주와의 관계로 확장되거나 집약되는 속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에 내 철학적 소양이 부족하니 좀 줄여보자.
인간관계는 본원적으로 ‘누구인 나’와 ‘누구인 너’와의 관계이다.
문제는 바로 ‘누구’란 것이 뚜렷하지 않다는데 있다.
이것은 바로 ‘뚜렷하지 않는 나’와 ‘뚜렷하지 않는 너’의 만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만남 즉 인간관계 조차도 뚜렷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이런 불특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특정의 욕구를 자극한다.
나를 특정 짓는 작업을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 정체성은 많은 부분이 인간 관계를 통해 확인되고 수정된다.
그러나 자기정체성은 일정이나 공정이 정해진 대량 생산품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가 맞춤 생산품도 아니다.
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은 타인의 주문에 의해서도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다.
< 난해성에 대한 이론적 접근과 대안>
이런 난해성을 이론적으로 풀 수는 없을까?
정답이 없는 이 문제에 대한 이론은 바로 非이론일텐데 말이다.
마침 적당한 것이 있다.
증권가에서 사용되는 이론 중에 랜덤워크 이론이란 것이 있다.
주가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나 어떤 패턴에 제약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즉, 금일의 주가는 오늘의 모든 변동요인을 반영하여 형성된 것이고,
내일의 주가는 내일의 변동요인을 반영한 것이므로 상호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가는 일반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을 갖고 있어 랜덤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아예 주가예측을 바탕으로 주식투자를 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이론이다.
그래서 랜덤워크 이론가들은 주가와 관련없이 투자수익을 높일 수 있는 투자전략 개발에 노력한 결과
포트폴리오 방식과 포뮬러 플랜 방식을 널리 활용하게 되었다.
포트폴리오 방식은 여러 유가증권에 효율적으로 분산투자를 하여 위험을 감소시키고 수익을 높이고자 하는 투자전략이고
포뮬러 플랜은 주가예측을 무시하고 일정한 기준을 정하여 자동적으로 투자의사를 결정하는 투자기법이다.
이것을 인간관계의 랜덤 워크 이론으로 만들어 보자.
인간관계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나 어떤 패턴에 제약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이야기다)
즉, 현재의 인간관계는 현재까지의 오늘의 모든 변동요인을 반영하여 형성된 것이고,
향후의 인간관계는 향후의 변동요인을 반영할 것이므로 인간관계는 특정 변동 요인을 지정할 수 없는 한,
각 개인들과의 인간관계 혹은 그들과의 현재와 미래의 인간관계는 상호 독립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인간관계는 일반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우발성을 갖고 있어 랜덤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아예 인간관계 이론이나 예측을 바탕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하거나 지속할 수는 없다고 단정짓는 이론이다.
그래서 철학자, 심리학자, 윤리학자, 종교인 혹은 관상가들에 이르는 수 많은 랜덤워크 이론가들은
어떤 개인의 특수성과 관련 없이 인간관계를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인간관계 전략 개발에 노력한 결과
포트폴리오 방식과 포뮬러 플랜 방식을 널리 활용하게 되었다.
포트폴리오 방식은 여러 가지 상황과 인간의 보편적 심성에 기초해서 공통되고 좋다고 하는 품성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갖가지 지식과 훈련에 분산투자 하여 인간관계의 위험을 감소시키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
개인적인 이익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인간관계전략이고,
포뮬러 플랜은 인간관계의 일반적인 이론이나 분석은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일정한 기준을 정하여
자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만을 발굴 유지해가는 선별적 인간관계 기법이다.
비슷한가?
즉 인간관계의 랜덤워크 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인간관계의 문제란 것은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과도 아주 다양한 감정과 의미로 관계를 갖는데
이런 개인이 불특정의 다른 개인과 불특정의 감정 혹은 의미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발성 요인이 매우 큰 문제라는 점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두 가지 가설적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관계는 이런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요소들 때문에 어렵다.
그래도 두 가지 가설적 접근이라는 문제로 요약을 하니 좀 나아진 듯하다.
<사람 사이와 인간 關係>
사람 사이란 표현과 인간관계라는 표현의 거리는 ‘홀로 삶’과 ‘더불어 삶’의 거리만큼 멀어 보인다.
우리말의 사람은 ‘살음’이라 동사가 명사화된 것으로 생존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쪽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나’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무척 중요시 한다.
하지만 한자의 인(人) 그 형상 자체가 복수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독립된 ‘나’보다는 ‘누구의 나’로서의 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친구보다는 형제의식이 강하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같은 뿌리에 소속되어 ‘누구의 나’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인간(人間)이라 표현한다. 즉 ‘복수의 사람 사이의 무엇’에 집중한다.
굳이 꼬집자면 사람 그 자체보다는 그 관계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섬나라 사람의 습성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아무리 아등바등 해봐야 바다가 막혀 달리 갈 곳이 없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굳이 사이 間자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예절이라는 것이 이 거리에 대한 암묵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혼네와 다떼마에가 그렇고 와(和)라는 명분으로 규격화된 ‘어떤 모습으로 비춰져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들이 그렇다.
그래서 사람 사이와 인간관계라는 표현의 거리는 ‘어떤 나’와 ‘누구의 나’와 ‘어떻게 나’의 차이 만큼 멀다.
(일본의 경우를 마땅히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 굳이 영어로 해석하면
“ What am I?” “ Who’s am I?” “ How am I?”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람 사이와 인간관계.
사람 사이란 것은 일대 일의 연결(관계)을 의미한다.
한 개인으로서 다른 한 개인과의 의미를 사람 사이라고 한다면,
인간 관계라는 것은 한 개인이 불특정 다수와의 연결에 대한 집합적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둘 다 주어로서 사용되면 호,불호의 서술이 붙기는 마찬가지지만
인간 관계가 좋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좋거나 인맥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 사이는 아주 고유한 특성을 갖는 반면 인간 관계는 개인적인 사람과의 경험이 집단적 사람과의 관계로
보편화되거나 일반화되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은 그의 성향을 일반적인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교적이라든가, 외향적이라든가 겸손하다든가, 활동적이라든가 세심하다든가 등등 이런 구분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품성일 것이다.
반면 깐깐하다든가 독선적이라든가 외고집이라든가 꽉 막혔다든가 하는 구분들은 나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품성이다.
한 사람의 특수성이나 개별성 보다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이런 일반적인 품성들로 구분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칙이니 공식이니 하는 이야기로 단정적으로 말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 공감하는 말이나 글을 내 놓은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그런 단정적인 인간 관계의 기술을 논하거나 설명한 책들 조차 서두나 말미는 항상 “끊임없는 숙제” 또는
“ 해답이 없는 문제” 라는 문구가 반드시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개별적인 ‘사이’가 일반적인 ‘관계’의 전형일 수 없고,
일반적인 '관계'가 개별적인 '사이' 전체를 대변할 수 없는 문제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묶음’으로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는 ‘관계’라는 단어에 집착하면 공식을 만들기도 쉽고 많은 기존의 공식에 대입하기도 쉽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나 경험에 의한 우선순위와 일반화된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 하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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