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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잡생각들

내 아이들에게도 고향을 주고 싶다

요즘 아이들은 고향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가끔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386 세대인 나 조차도 나의 아버지의 고향 말고는 이곳이 내 고향이다 싶은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마음이 복잡하고 어딘가에 귀속되고 싶은 욕망이 밀려 올 때 향수라는 단어는 떠 올릴 수 있지만 향수의 대상이 없다. 아마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곧잘 울산이라고 답하곤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아버지의 고향과 울산의 경계쯤 되는 입실이라는 마을인데 아버지의 고향인 경주 마을 보다는 내가 자란 곳인 울산에 가깝기 때문에 아마 자란 곳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울산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집은 그곳 도로를 지나다 보면 아직도 보인다. 언젠가 가친께서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저곳을 생가로 보존할 수 있도록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때는 내심 그렇게 해야겠다 마음도 먹었지만 마흔 중반에 이른 지금은 세상 살면서 생가를 보존해야 할 만큼의 훌륭한 일이란 것이 뭔 대수겠냐며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하고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지 그런 표시는 소인배나 내는 것이라며 쉰 소리를 하고는 한다. 그러나 태어난 집에서 인생의 말년을 정원을 가꾸며 책과 벗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이 서로 자기가 태어난 병원을 자랑하며 다툼하는 것을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바란 본 기억이 있다. 과연 이 아이들은 어떤 장소에 귀속해서 그들의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을까?

결국 병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죽어서도 내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것 같다.

 

각설하고, 태어난 곳 즉 고향에 대한 정서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적기 시작했다. 고향에  대한 정서는 주로 그 공간과 사람과 사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공간과 사람과 사건들은 비교적 철이 든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한 장소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다는 것은 사람의 정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된다.

 

다섯 살 때부터 살기 시작해서 대학을 다니러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 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곳

저곳을 걸어 다니며 놀았던 울산은 지금은 제법 삭막한 도시의 풍모를 가지고 있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 장소가 변하기 전의 이미지를 오버랩 할 수 있으므로 아주 강한 소속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곳에서의 나의 청소년기에 만난 사람들, 그들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들이 아직도 내게 잠재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삶의 원칙들에 대해 고민했었고, 내 미래상을 그려보기도 했으며 인생을 함께 할 친구를 사귀었고 한국의 성장 동력 산업들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는 지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특히 친구들과의 만남은 내가 사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신뢰의 기반이 되었고, 고교 시절의 친구들과의 말장난 놀이는 내가 지금 가진 유머 감각의 기초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청소년기를 울산에서 보낸 것은 나로서는 축복이라 생각한다.  

 

다행이 나의 아이들은 부산을 자신의 고향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부산은 이 아이들에게 조차 낯선 곳이

많은 조금은 불안한 곳이다. 도시의 어느 외진 곳에 데려다 놓아도 언제든지 집을 찾아 올 수 있을 만큼의 안정감을 주는 도시는 아니다. 그리고 내가 차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쉽게 길을 나서지 않는 습성도 가졌다. 과연 내가 이 아이들에게 부산을 고향으로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