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한 권의 감동은 평생을 간다
고전,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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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마음먹고 고전 읽기
처세서나 재테크 상식을 읽기에도 바쁜데 난데없이 ‘고전古典’이라니? 그 ‘오래된 이야기’가 과연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자. <죄와 벌>을 통해 우리는 양심을 고민하고, <노인과 바다>로부터 인생의 시련에 맞서는 법을 깊이 사유할 수 있다. 평생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지혜로운 삶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만일 아직 그런 경험을 얻지 못했다면 2009년 가을, 마음먹고 고전 읽기에 도전해보자. 독서하기 좋은 계절,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의 문화원 원장 6인이 자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고전을 추천했다. 인류의 사상과 철학, 예술에 이바지한 이들 나라에서 꼽는 고전을 살펴보며 그것이 세월을 넘어 널리 읽히는 이유, 왜 인생의 지혜로운 스승이자 멘토가 되는지를 지금부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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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는 그 분량만 1000페이지가 넘는다. <삼국지>와 <서유기>는 짧게는 예닐곱 권, 길게는 열 권 넘는 시리즈로 구성되며, 단테의 <신곡>은 본문보다 딸린 주석이 더 많다. 낯선 시대 배경, 좀처럼 몰입하기 힘든 문장…. 고전을 펼쳐 들자마자 마치 쓰디쓴 약을 삼키듯 고통이 밀려온다. 두세 살 차이에도 대화의 단절이 느껴지는 시대에 몇 백 년 전 작품을 쉽게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고전이란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은 책”이라던 마크 트웨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후련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고전을 역사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고려시대의 책도 고전이며, 동시대의 명저도 고전이 될 수 있다. 고전 속의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돈키호테>와 <임꺽정>은 얼마나 위트 넘치는 스토리인가?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고전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놀이동산처럼 입장권만 내면 언제든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그보다 몇 배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정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고전이 어렵다는 말은 결국 고전을 읽지 않은 이들이 만든 핑계다.
본연의 생각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라는 복잡한 매트릭스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공간의 출구를 찾아주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사유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하고, 그 지도는 우리의 일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타당한 지혜와 위트를 담은 텍스트!’상식의 범주 안에 든 서적은 고전이 아니다. 수천, 수만 부가 팔렸어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 사라지는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우리를 단지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데 그친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해하고 감동하는 것은 고전이 아니다. 흔히 물질 다음으로 정신을 얻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탐욕이다. 온몸이 화려하게 빛나도 내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면 결국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가? 물질과 정신의 앎을 통한 ‘시공간의 자유’를 확보할 때라야 진정 럭셔리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고전 한 권은 평생을 간다. 인생의 질곡에 부딪힐 때마다 일상의 나를 정화하는 힘이 된다.
좌충우돌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 세계’로 풍덩 빠져드는 때가 온다. 고전을 읽을 때는 항상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선 지금 여기의 삶, 이곳의 출구를 위해 어떤 고전을 만나야 하는지 자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여행의 길목에서 만나는 스승이 고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멘토다. 성경이나 법전을 두렵다고 밀어낼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읽고 또 읽어라. 나는 수차례 같은 책을 반복해 읽는데, 한두 번 읽어서는 고전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술과 낭송을 통해 고전을 체득했다. 중요한 구절은 메모해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도 좋고, 줄거리 등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설명하는 것도 좋다. 그 정도가 되어야 고전을 완전히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평생 고전을 대하라. 그 꾸준한 관심만이 고전에서 해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전이 어렵다고 겁내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박사 논문을 쓸 때까지 고전과 나 사이에는 괴리감이 존재했다. 고전을 학문의 도구로서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 스터디를 통해 <열하일기>를 만난 뒤 시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하일기>에 현시대의 고민을 넣으니 무엇이든 과거에 반추해 답이 나오더라. 그를 통해 고전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길이자 최고의 근거이며, 스승이자 벗임을 알게 되었다. <열하일기>의 매력은 각기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놀라운 변주에 있다. 마치 교향곡이나 소나타처럼 모든 형식의 악곡이 등장한다. 길 위에서 떠돈다는 쉽지 않은 설정 아래 그 정도의 변주를 내는 작가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고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일직선상에 놓인 관계가 아니다. 곡선처럼 매순간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고전을 통해 단순히 과거를 들춰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고전을 선별해 답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지난 20세기에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었다면,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고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지금 시점에서 정약용의 책은 현재와 접속이 안 된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시대, 스스로가 누군지 모른 채 부평초처럼 삶을 흘려보내는 요즘 시대에 <목민심서>는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며 학문적이다. 그보다는 길 위에서 삶을 논하는 조선시대 노매드 박지원의 가르침이 지금 우리에게 더 적확할 것이다. 1980년대에는 신동엽이나 이수영의 시처럼 혁명의 문제를 다룬 고전이 널리 읽혔지만, 지금 시대에는 잘 읽히지 않는 것 또한 그런 이유다.
결국 ‘위트’의 문제다. 우리 고전은 대부분 해피 엔딩을 추구한다. 흔히 한의 정서가 녹아 있다고 하는데, <춘향전>이나 <수궁가> 할 것 없이 한바탕 축제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반드시 주인공은 눈이 멀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비장함은 20세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잘못 들어온 것이다. 서양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이후 천재의 삶은 반드시 비장하고 슬퍼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리스극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서양 고전이 웅장하고 비극적인 스토리를 강조하는 데 반해, 동양 고전은 해탈의 경지, 즉 완벽한 대자유를 말한다. 공자가 집필한 어떤 책을 보더라도 비극이 강조되지 않는다. 장수를 통해 결국 모두가 오래 산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어떻게 비극이 되겠는가? 비극적이고 무거운 것만이 진리라는 서양 고전만을 칭송하는 관념은 버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구 어디든 더 뛰어난 텍스트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고 답이다. 고전은 인류 공통의 자산이기 때문에 국수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고전은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널리 읽히는 책인 만큼 끊임없이 읽고 또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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