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신자의 도마일기

시론과 종교성의 문제에 대한 단상

[ 시론과 종교성의 문제에 대한 단상 ]

 

시란 행간의 의미를 읽어가듯 사물에 투영된 사람을 읽어가는 작업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되기도 하고 타인이 되기도 하며, 혹은 우리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한 농촌의 밭이 채 끝나지도 않은 포도 변에 어색하게도 우뚝 서있는

한 동의 아파트를 상상해보면, 우린 그것이 흡사 듣기 좋은 곡조의 노래에 불협화음이

끼어 있는 듯 느낄지도 모른다.

도시적인 상징이 그 아파트가 그 지역을 더욱 촌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모습의 아파트가 어느 대도시 한구석에 떼거지로 모여 있는 경우

우리 때로 그 야경을 통해 당당함과 함께 소외감을 가질 수도 있고,

혹은 그 거친 빌딩들이 잡스럽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우린 다른 시각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시각이란 것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처한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에 일관적인 공식을 가진 것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의 본질을 의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복선을 염두에 두기도 하는 그런 작업이다.

그 작업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해본다.

 

과연 세상은 우리의 눈을 통해 얼마나 그 진실을 드러내겠는가?

혹은 과연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은 얼마나 투영할 수 있겠는가? 등등

바로 시각에 대한 의심이다.

 

우리의 눈과 귀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들려주고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또 하나의 감각인 영감이 그 실존의 모습을 조금 드러내거나 왜곡한다.

 

시인이 시론을 가지는 것은 결국 어떤 편향성을 선택하는 것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한 종교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우리의 편향성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오늘 JOY 전도사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심성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

이는 분명 창조주가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허락한 자유 의지에 의해 우린 종교적인 성향을 띤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는 내가 선택한 종교적인 방법이 진리에 이르는 바른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 예를 들면 불교 이슬람교 등등..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이신 신의 존재, 그 창조주의 존재가 사람들의 시각에 왜곡되어 버린 것일 수 있다.

(사실 카톨릭,유대교,이슬람교 모두 기독교와 일부지만 공통의 경전과 공통의 유일신을

섬긴다. 다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내 아버지에게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시각이 틀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진리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며 신께 구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시각에서는 그들에게 신이 없다. 그들이 스스로 신을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분명 창조주 하나님과 그 아들의 존재를 믿고 따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 속에는 우리가 만든 하나님은 없는가?

수많은 구복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만의 하나님을 만들지는 않는가?

 

이런 것들 또한 나의 편향성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안개처럼 생겨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