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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삶의 구속들..


대학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참 니체니 비트겐쉬타인이니 하는 이름들을 입에 올리면서

현대 철학에 관심이 있을 때였습니다.
" 이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자유로움을 성취한 것이 아닐까?"
즉 독창적 사유 능력이 자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는 인증서인양 생각했었지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80년대 대학가의 최대 이슈였습니다.
"민주화"란 단어에 우리는 숙연해지기 까지 했습니다.
그 때의 대학생들은 왜곡된 사실에 대한 분노와

진리마저 권력의 노리개로 전락해 버리도록 방조한

기성 세대에 대한 분노를 토로함으로써

우리는 자유 쟁취를 위해 무장하는 해방군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때의 자유로운 삶이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고 사회적 사명이었습니다.
개인들은 언제나처럼 제한된 자유로움에 익숙해있던 상태였으니까요.
인류의 역사는 항상 제한된 자유에서 그 제한을 걷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관념적으로 흐르는군요.)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이 '제한된 자유에의 익숙함'입니다.
환경적 제한이 실제로 존재함에도 우리는 마음 다스리기 하나로 그 제한을

제한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는 묘한(?)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자조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상황이 변화하지 않았는데 마음을 바꾼다고

상황이 변화하겠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바꾸어야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교회 바깥에서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제한된 자유에의 익숙함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자유의지의 부여와 자유로운 삶의 구속의 아이러니들...]

 

세상사람들이 다 하는 것을 안 된다고 스스로 정해 놓고, 일요일에 산과 들로

건전한 여가를 즐기러 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교인들이 오히려 불쌍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그들 스스로 주 안에서 자유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제한된 자유를 자유라고 우기는 우상의 동굴에 칩거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로

때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열심히 교회 다니는 아내를 둔 덕에 여러 가지 방어(?)논리를 키울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흡사 무당한테 하듯이 예수님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의 얻은 구속을 예수를 통해 해결해 보려는 구복 신앙적인 측면 말입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부분도 예수님은 주일에도 일하셨는데 왜 굳이 구약적인 유대인의

제사 원칙을 고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교회 안에서의 구속들이 주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로움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 들은 영적 체험을 통한 신앙적 자유의 획득이 관념적 수준의 자유와는

구별되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지요.

(사실 신앙 안에서의 자유는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결과지요)

모르기는 해도 진정한 주 안에서의 자유로움은 체험에서 오는 것이며

성령 체험 등의 신비적 체험뿐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여러 경험을 통해

진정한 자유로움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은 확실히 일 대 일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통한 자유로움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유란 본질적으로 독창적이거나 구속이 없음이 아니라

또 다른 구속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세상에서 자유로움 삶을 구가하기 위해서 동전의 이면처럼 따라 붙는 것이

책임지는 자세이듯,

신앙생활에서도 또 다른 구속으로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믿음에 걸 맞는 행동적 책임이 따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안에서의 자유로운 삶, 개인적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임은 분명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