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채와 헌금
점을 보거나 무당에게 굿을 하면 복채를 줍니다.
무당들의 영업행위는 고도의 심리적 비지니스입니다.
굿을 얼마 얼마짜리 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그 귀신을 팔아 가격에 따라 효험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막상 굿을 하면서 귀신에게 바치는 돈을 따로 요구하는 수법으로 최소의 시간에 최대한 많은 돈을 빼내지요.
정말 신내림으로 하는 무당은 어쩔 수 없이 하기 때문에 돈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반면에 사주를 보는 철학관은 상담료를 받습니다.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따라 가격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몇 만원 수준이지요. 그런데 돈 버는 철학관 관장은 뭐 가지고 버느냐? 부적 값입니다. 부적의 종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그 효험이 틀리기 때문이지요.
이제 헌금으로 갈까요?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 혹시 무당한테 하듯이 복을 구하는 마음으로 하지는 않습니까? 효험, 우리 용어로 고치면 구하는 복에 비례하는 정도의 헌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십일조를 하면 반드시 돌려주신다!"란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은 조금 오해하면 하나님께 돈을 구하기 위해 돈을 바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인간에게 복 주시겠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인간에게 돈을 바치라 하시겠습니까? 예물로 바치는 돈이 흡사 번제처럼 흠향되겠습니까?
가끔 예배시간에 예물 바친 사람 이름이 호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솔직히 개인적으로 참 아니다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비지니스 냄새가 났거든요.
물론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의 먼저 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순위도 주셨고 그 방법도 주셨습니다.
구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헌금을 연보라 한것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고 각기 물질적 소산이 다름으로 인한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순기능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데 도구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내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자발적 균형 작용이라고 보여집니다. 좋은 일에 쓰이기 위한 헌금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은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헌금이 줄 수 있는 위화감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사례가 있었음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11조와 감사 헌금 봉투 두 가지만 있으면 되지 용도가 다른 헌금 봉투가 왜 그리 많아야 하는지요. 예수님이 직접 하신 연보의 일화도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의 연보는 그 가진 모든 것을 낸 것이므로 더욱 값있다 하셨습니다. 있어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없어도 전부를 걸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나눔은 그 자체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희생하는 나눔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사랑에 기초한 나눔, 그리고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내 것이 아니기에 환원한다는 생각이 헌금의 기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믿지 않을 때 참 크고 화려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클 필요가 있느냐고, 그 돈이면 이웃을 돕는 일에 써야 하지 않느냐고 비판했던 나 자신이 기억됩니다.
교회가 크다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믿음이 큰 교회를 좋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큰 교회가 교세의 확장을 위한 노력의 결과일까요, 전도의 활성화로 인한 결과물일까요?
둘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참 틀린 이야기입니다.
흡사 성공을 목적으로 보느냐 성공적인 삶의 결과물로 보느냐와 비유될 수 있는 차이입니다.
교회가 활성화된다는 이야기는 교회가 교회답게 되어간다는 이야기 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또 신앙이 길러지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곳, 이것이 정말 잘 이뤄진다면 자연히 교회는 커질 것이라 생각됩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계셔서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스스로 믿음의 생활의 중심으로 잘 꾸려나간다면 교회는 커질 것입니다.
더 많은 믿음의 양육을 위해 교회가 클 필요가 있을 수 있지요.
하지만 크면서도 검소함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곳곳에 색 바랜 우리 교회의 강대상이 정이 갈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성도를 구하기 전에 제대로 자리잡은 성도가 길러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둘은 어떤 것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우선 순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같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우연히 큰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쓴 넋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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