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기독교인
어느 집단이든지 빈부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요.
우리나라가 IMF를 겪기 전에만 해도 한 언론사에서 실시한 통계를 보면 심리적으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가구가 전체의 60%이상을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중산층이 20% 이하로 줄어들었지요. 그 직접적인 원인은 옛날 조사에서는 급여 생활자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했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평균 수입 하락한 것은 아니거든요. 이것은 부유함과 가난이 객관적 잣대보다 인지적 잣대에 의해 구분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80대 20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전체 부의 80%는 그 인구의 20%가 소유하고 있고, 어느 회사 매출의 80%는 20%의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며 , 전체 범죄의 80%는 범죄인의 20%가 저지르고 있고 , 회사는 전체 직원의 20%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통계학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한 귀납적 이론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전체 교인의 20% 정도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일지 모르고 , 교회 재정의 80%는 20%의 신도로부터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그 20%가
부자이고 나머지 80%는 가난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그건 너무나 뻔한 모순입니다.
단지 우리는 부가 편중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이론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관련해서 보면 가난한 교회와 부자 교회가 구분되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시절 친하게 지낸 선배가 교회 청년부에서 물놀이를 갔다가 익사했었습니다. 그 여동생이 저와 같은 학번 친구였지요. 그런데 그 집안이 경기도 어느 시골 마을의 목사님 가족이었습니다. 문상을 가서 본 그 교회는 참으로 초라했습니다. 그 때 왜 부자 교회와 가난한 교회가 있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재수 시절에 학원에서 만난 친구는 아버지가 대전의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친구의 당시 상당히 풍족한 생활이 대비되더군요. 목회자의 소명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갑니다만 당시로서는 제게 또 하나의 좋은 교회 비판거리였지요.
또한 가난한 신도와 부자 신도가 구분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위안의 말이 상투적으로 건네지기도 하지요.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참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사실 제가 요즘 좀 가난하거든요. 집 있고 차 있고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가난하다고 하는 말이 어불성설이라고요? 보이는 것과 속내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
위에 열거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빈부의 문제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현상이며, 빈부에 대한 기준은 개인의 인지적 잣대에 의해 많이 좌우되고 실제로 부는 20%정도의 인구에 편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 빈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저에게 누가 묻는다면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야 부끄러울 것이 없지요. 세상 사람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불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요. 가난은 대부분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첫째가 자신에 대해 나약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세상에 대해 나약하기 때문이며
셋째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나약하기 때문이며
넷째로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지막 넷째가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형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분은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이 없이 일하셨습니다. 인간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잡고자 섬김과 낮은 곳에 임하시는 정말 엄청난 전략으로 그가 사신 세상 뿐 아니라
그 뒤의 세상에 대해 이기고 끌어 안으신 예수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한 우리는 그 분이 보여 주신 그 절실한 삶의 자세와 또 지금도 열심히 일하시는 것에 대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기도로 세상을 열고 ,열심히 일한다면 우리는 결코 가난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결코 가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난은 한 세대의 삶의 결과로서 세습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흡사 우리 죄가 세대를 이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고 다만 불편할 뿐이라고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제 생각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통한 승리와 기독교인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자가 어떠냐에 달려있습니다.
깨어있는 가난한 자는 이미 가난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난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가난은 일시적인 가난이요 고통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연단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자는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 기독교인들은 모두 부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우리의 삶의 모델을 따라간다면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연단을 믿으시는 분들이라면
일시적 가난에 대해 의연히 대처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도 가난함에
대해 체험적 경험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세상과 나누며 사는 세상이 필요한 이유와 자신의
소명과 삶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같이 노력하셔서 세상의 20%, 믿는 자 가운데서의 20% , 그리고 더불어 살고,나눔을 실천하는 80%의 영향력을 기르는 기독교인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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