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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의 도마일기

기도에 대한 말씀의 응답에 대한 기록

이글은 변영인 교수님의 강의가 있던 예배에 참석하고 쓴 것 입니다.

 

내게 응답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지금도 가지는데

제 스스로도 이런 것을 응답으로 받아 들인적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합니다.

 

 

< 기도와 응답 >

 

사람이 살다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일 수도 있고요.

 

제가 평소에 구복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구복 신앙은 기복 신앙과 구지 구별될 필요는 없지만  기독교인으로서 고집을 부리자면

구복은 복을 구하는 것이고 , 기복은 복을 비는 것이라는 점에서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명히 하자면 구복은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그 분복을 주십사 구하는 것이고 그 근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 것에 대한 서원이나 고백이 기본이 됩니다. 구복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는 행위이므로 값을 지불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기복은 복을 구하는 것은 같으나 복을 값으로 사는 행위가 개입됩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반성과 자신에 대한 어떤 되돌아 봄도 없이 무당을 사서 혹은 점집에서 얼마짜리 굿이나 부적으로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구복은  구하는 것은 다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기도를 통한 구복에 있어 그 응답이 없음으로 인해 종교적인 좌절,

은 믿음의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이 약한 제가 기도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는 제가

가끔 애매한 것이 하나님은 사람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때에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구하는 때에 구하는 것을 모두 주신다면 하나님은 현금 지급기 마냥 복을 지급

하는 자동화 장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란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침묵하시는 그분에 대해 제가 좀 특별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내가 항상 특별한 무엇이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어제 변영인 교수의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곰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란 것에 대

한 응답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에서 하나님은 마흔이

넘어서 그 때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해 8개월을 한끼만 먹고 주방에서 공부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간증 속에서 제게 용기를 준 것은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묵묵 부답이었습니다

고백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묵묵 부답에 대해 저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 분명

히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무엇을 겁내느냐 5만번 응답

받은 뮬러의 기도라는 책 겉표지에 쓰인 문구가  새삼 큰 글자로 다가왔습니다. 기도도 하

지 않으면서 단지 내가 주를 믿사오니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리

라는 정말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정말 끈질기게 주님을 물고 늘어져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세례 받은 지 1년이 안되어 성경 일독을 마친,꽤나 열심인

신자로서 저를 포장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저를 다른 것으로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좌절로부터의 도피로서 교회를 택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봅니다.

 

결국은 제가 지금 구하는 것이 세상의 성공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신 것이 많음에 대

한 감사보다 , 그리고 그 동안 죄의식이 없이 거리낌 없이 해 왔던 내 사업가적 기질의 삶

이 사실은 죄악의 그늘 아래서 내가 누리려 했던 쾌락에 대한 변명이란 것에 대한 고백보다

그리고 주신 것에 대해 소중히 해야 하는 의무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그분을 하나님

으로 믿는 정말 일찍이도 우상을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심과 교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온 내가 욕심과 교만으로 나만의 하나님을 만들고 있

었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 때 목사님의 말씀 중에 예수께서 처음 행하신 이적에 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대단하지도 않은 물항아리에 부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다. 보는 이에

따라 그 당시 많은 술법사들이 행했던 하찮은 술에 물타기 기술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포도주에 조애가 깊어 포도주를 이용한 새로운 음료를 개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이적은 광양에서의 시련에서 이기신 후에 행하신 처음 이적이란 것입니다. 즉 영적 싸움에서 먼저 이기신 후에 행하신 것이란 점입니다.

우리도 이 같이 하라는 당부 말씀이 오늘 유난히 와 닿았습니다.

 

나는 정말 절실히 영적 싸움에 임했던가?

전적으로 창조주에 의지하는 삶, 내 고집을 내려 놓고 오직 성령에 이끌리는 삶,

아직 제게는 멀리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해야 할 것이 제가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고 그분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 살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때 하겠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 다음은 기적을 바라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 제 개인에게는 기적적인 일이듯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기적을 숨겨 놓고 계십니다. 저는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 동안의 짧은 기도에도 이 같은 응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여 지속하게 하소서. 그리고 힘을 갖게 하소서..

세상에서 제가 고집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실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주를 위해 변화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