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선 제목부터가 파격적이다. 신앙 생활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도 좀 불경스러워
보인다. 불경이라기 보다는 파문 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공감도 가고 속 시원해 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을 대하면서 줄곧 답답했던 것들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적인 모순들…
그 모순들에 대해 많은 분들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전체적인 큰 틀을 보라고 말하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를 정면 도전하는 책이
없었다. 하나님의 인간적인 속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고 창세기 2장부터 생기는 의문의
연속이 구약을 다 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런 의문들에 대해 저자가 지적해 주었기 때문일까?
저자는 창세기 1장과 복음서 이외는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어찌 보면 극단적인 사람이
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그렇게 쓰고 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참하나님과 참하나님의 역사에 숨어든 여호와라는 잡신을 구별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여호와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존의 율법을 패하고 구약에 가리워진 참 하나님의 모습을 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우리 죄에 대한 대속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대한
모델로서의 예수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직접적인 교사로서의 예수님이다.
저자는 원죄부터 부정한다. 선악과를 통해 원죄의 함정을 만들어 놓은 자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어느 틈에 숨어든 여호와라고 말한다. 선악과는 불순종의 상징이다.
불순종에 대한 벌로서 죽음을 선사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인가 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제사 예법이 틀리다고 그 일족을 죽여버리고, 모세의 계명을 통해 살인하지 말라하고는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많은 살인의 역사들 즉 전쟁을 통한 역사가 구약의 그 나머지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정말 무자비한 ‘진멸’의 역사, 또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불신앙의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이방인의 손을 빌어 도륙의 역사를 펼치는 그런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구약은 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저자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쉬신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천지의 창조자가 인간을 위해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의 대업을 마치시고 쉬었으니 너희도 그 명령을 따르라는 이야기다.
반면 신약을 통한 보여지는 예수는 인간의 무지와 불순종에 대해 접근 법이 틀리다. 그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어주라 하셨고,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예수는 병을 고치고 마귀로부터 구하는 일들만을 하셨다. 예수는 사람을 벌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말하는 “ 사랑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모습인가 아니면 전자인 여호와의 모습인가? 또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도 “ 내 아버지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창세기 2장의 여호와의 명령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반박하셨을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면,그 아들이 아는
아버지는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인데 왜 창세기 2장의 여호와는 쉬었는가?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이 아니신가?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창조론을 믿기 때문이며, 예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을 주시고 , 그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신 것이며 , 그 터전 위에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신 은혜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그 공생애 동안의 가르침과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증언이 남아 있는 성경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요 ” 내게 기독교를 전도하는 사람이 하는 가장 전형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는 기도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대목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하고 기도하고 맨 나중에 “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라고 맺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예수께 간구해야 할 일들을 정작 예수님께 간구하는 기도가 아직까지는 교회에서 들어 보지 못했다. “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라는 구절 밖에는….
구약을 읽어 나가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나님이라고 천명하는지에 의문이 있었다. 왜 이방인들을 죽여야만 했는지,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고 그 이방인인 내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을꼬? 예수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구약에는 창세기 1장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역사는 없다. 출애굽의 역사도 수많은 애굽인들
의 죽음의 역사로부터 출발된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한 역사도 수많은 이방 족속을 진멸하는 역사이다. 죽음의 역사이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그 역사가 180도 바뀐다. 죽음의 역사가 아니고 회복의 역사이며
사랑의 역사이며 , 우매한 인간에게 지혜를 심어 주는 역사다. 성경 66권이 각기 다른 책
을 묶어 둔 것이라 하지만 왜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주일날 한 권으로 들고 다니는 이 성경에는 이토록 지독한 모순을 담고 있는 것인가? 지난 2000년 동안 이런 모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초대 교회에 대한 현재의 재평가 작업 뿐 아니라 중세
종교 개혁으로 거슬러가면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선각자들의 순교가 있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인간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왜 성경의 모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방치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있다는 것은 처음 기독교 관련 서적을 기웃거릴 때 알았지만 성경 내에 있는 모순에 대해 이 책처럼 꼬집고 있는 책은 없었다.
종교는 인간의 가장 큰 한계인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부분에 대한 안내이다. 그러면 많은 종교가 있는데 내가 왜 유독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성경적으로는 내가 그런 택하심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솔직히 표현하면 내가 우주를 창조하신 분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는 자각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자각이요 내가 나를 창조하신 분에 의해 이끌리는 무었이 있다는 소위 ‘ Feel’ 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인간인지라 꼬집을 수는 있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가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은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여호와를 도려내자는 것이었고
그 한 방편으로 창세기 1장과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말자라는 것이다.
참으로 이단적인 발언이다. 그러나 저자 역시 왜 하나님이 자기가 주장하듯 여호와가 성경 속에 숨어들어 하는 역사를 그대로 두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구약에 숨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중에 말씀으로 대적하신 그 구약의 구절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저자 역시 예수의 부활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글로써는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교계에서 저자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런 이단을 인정하고 싶다. 그 역시 나처럼 신앙을 방해하는 불신앙적인 요소를 없애버리고 싶은 바람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도를 통한 신비적인 체험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 기도가 구도를 위한 참선과 고행과 달라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영을 이끄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 대화(말씀)로 이끄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
이 우선 확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봐야 결국 인간적이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기에 최선을 다한다면 결국은 하나님, 창조주의 뜻에 이끌리는
피조물로서의 소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를 완성할 수는 없다.그것은 내가 신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직 나를 만드신 분만이 나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불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을 손으로 만져보는 도마의 신앙이 아니다. 신앙을 방해하는 불신앙의 요소들을 바로 알기 위함이요
제거하기 위함이요 예수 안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함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예수님과 다른
구약의 그 많은 모순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불신앙이라 한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
이 없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더라시던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 분을 바로 알고 그 분에 대한 가슴으로부터의 사랑, 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적인 사랑으로 되돌려 드리기 위해 , 그 사랑을 방해하고 있는 모순에 들에 대한 나의 이
지식적인 도전을 하나님이시여 도와주소서! 성령이시여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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